[이응인의 시로 읽는 세상] 영남루와 밀양 만세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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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는 시의 누각이다.
선인들이 쓴 영남루 시의 운을 따서 무수한 이들이 시를 썼다.
풍광이 뛰어난 영남루는 무수한 이들이 시로 노래하면서 더욱더 명물이 되어갔다.
밀양의 전통시장과 해천 주변은 1919년 '3.13 밀양 만세 의거'의 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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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되찾으려는 밀양사람만 하랴

밀양 영남루는 시의 누각이다. 선인들이 쓴 영남루 시의 운을 따서 무수한 이들이 시를 썼다. 자신이 쓴 시나 선조의 시가 새겨져 영남루에 걸린다는 것은 대단한 자존감의 표현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래서 화재로 시판이 불타거나 사라지면 후손들이 다시 판에 새겨서 걸었다.
1852년 김해부사로 부임하던 임익상(1789~?)은 밀양을 거쳐 가게 되었다. 당연히 풍광이 뛰어난 영남루 다락에 올라 힘차게 굽이치는 밀양강과 막힘없이 펼쳐진 경치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6대조인 임의백(1605~1667)의 시가 어디에 걸려 있는지 찾았다. 분명히 영남루에 걸려 있다는 걸 알고 왔고 시를 달달 외우고 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임익상은 6대조의 7언절구를 판에 새겨 다시 걸고는 부임지 김해로 향했다.
조선 전기 뛰어난 문장가였던 서거정은 1478년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다가 밀양에 들러 '밀양십경'을 노래한 시를 남겼다. 영남루에서 바라본 뛰어난 풍경을 10편으로 노래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다 담았다. 그가 영남루에서 사계절의 풍경을 다 본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풍광이 뛰어난 영남루는 무수한 이들이 시로 노래하면서 더욱더 명물이 되어갔다. 그래서 '밀양에 영남루가 없으면 이는 밀양이 아니다'(김재화, '영남루중수기')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퇴계의 후손인 향산 이만도(1842~1910)는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경북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24일 만에 순국했다. 그의 영남루 시는 빼어난 경치를 노래한 여러 시들과 결이 다르다. "거대한 절벽이 삼 리 성곽을 지탱하고/ 나는 듯한 기왓골은 만 집 연기를 피우네./ 총마사 되어 백성 일을 논하면서부터/ 공무가 아니면 잔치 자리에 오르지 않네." 공무가 아니면 잔치 자리에 오르지 않는 자세에서 선비로서의 꼿꼿함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밀양의 전통시장과 해천 주변은 1919년 '3.13 밀양 만세 의거'의 명소이다. 고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윤치형과 윤세주는 서울에서 3.1 만세의 현장을 직접 보고 독립선언서를 품에 간직한 채 돌아왔다. 이들은 밀양 장날에 만세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윤세주는 의거에 참여할 사람을 모으고 연판장에 서명을 받았으며, 윤치형은 깃발과 태극기 같은 준비물을 챙겼다. 3월 13일,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앞세운 행렬은 시장통을 가득 메웠다. 이후 윤세주는 김원봉과 의열단 창단의 주역이 되었고, 밀양폭탄사건으로 붙잡혀 7년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태항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총상을 입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오로지 나라를 되찾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다.
"청춘의 절반은 감옥에서/ 나머지 절반은 광야에서/ 오로지 하나만 위해/ 쓰디쓴 삶을 살았지만 나 윤세주, 여기 태항산에서/ 들찔레처럼 소리 없이 진다 해도/ 대한의 독립이 이루어진다면/ 무슨 여한 있으랴 천장절 일장기 똥통에 꽂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밀양 장터에서 독립선언서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 목 터지게 외치던 그때부터/ 나의 길은 오로지 한 길"(김영조 시, '찔레꽃으로 살다가')
윤세주의 뜨거운 삶을 노래한 시이다. 장소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혼을 담는 그릇이다. 그리고 시는 그 혼이 피워올린 노래이다.
/이응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