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꺼낸 바다 <56> 주상전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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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공기의 질감부터 다르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돈다.
하지만 의욕이 앞서는 만큼 마음은 급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좋은 봄날을 만끽하기도 전에, '잘 해내야 한다'는 조급함에 떠밀려 허둥지둥 3월을 흘려보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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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화가 최북, 唐詩 바탕 그림
- 나룻배서 차 달이는 늙은 어부
- 유유자적 마주한 시간·삶 즐겨
3월은 공기의 질감부터 다르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돈다. 새 학기, 새로운 만남, 곧 터질 듯한 꽃망울까지. 일상은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득찬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계절은 없다. 하지만 의욕이 앞서는 만큼 마음은 급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좋은 봄날을 만끽하기도 전에, ‘잘 해내야 한다’는 조급함에 떠밀려 허둥지둥 3월을 흘려보내곤 한다.

모두가 기분 좋은 들뜸을 느끼는 이 계절,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림 한 점을 소개하고 싶다.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조선 시대 화가 최북의 ‘주상전다도(舟上煎茶圖)’다. 제목을 풀면 ‘배 위에서 차를 달이는 그림’이다. 그림을 살펴보면 기암절벽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 작은 나룻배 한 척이 떠 있다. 배 위의 노인은 화로에 불을 지펴 차를 끓인다. 바람에 수풀이 일렁이고 물결이 쉼 없이 흐르지만, 노인은 그 흐름에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는 배 위에서 차를 달이는 ‘지금 이 순간’의 정취에 깊이 빠져 있다.
이 그림은 중국 당나라 시인 유종원의 시 ‘어옹(漁翁)’을 바탕으로 한다. 최북은 시 첫 구절을 그림 속 절벽에 직접 새겨 넣었다. “고기 잡는 늙은이는 서산의 바위 곁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맑은 상강 물 길어 초나라 대(楚竹)로 불 지피네.” 시에 등장하는 늙은 어부는 특별한 계획 없이 하루를 보낸다. 그는 바위 곁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 맑은 강물을 긷는다. 최북은 이 유유자적한 어부의 하루를 붓끝으로 옮겨왔다.
예부터 어부는 세속의 명예와 부를 등지고 자연 속에 안분자족하는 은둔자의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분주한 3월의 출발선에 선 우리에게 이 그림은 사뭇 다른 울림을 준다. 시 내용처럼 어부는 어딘가에 닿기 위해 서둘러 노를 젓지 않는다. 그저 흐르는 강물과 하나되어, 눈앞의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뿐이다. 남들이 정해놓은 속도나 목적지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의 풍류를 미루지도 않는다. 유유히 흐르는 물 위에서 자신만의 고요한 즐거움을 누리는 그는, 마치 시간의 진정한 주인 같다.
이처럼 봄의 설렘을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무작정 달리는 ‘속도’가 아니라,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음미’가 아닐까. 배 위 노인이 차를 달이는 시간은 그 자체로 몰입의 시간이다. 끓어오르는 찻물 소리에 귀 기울이고, 향을 맡으며 그는 눈앞 풍경과 감각에 오롯이 집중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태도다. 쏟아지는 새로운 일들에 정신없이 휩쓸리기보다, 지금 내가 마주한 새로운 시작의 순간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즐기는 것이다.
3월은 빨리 지나가게 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달이다. 이 설렘이 속도에 희석되지 않도록, 흐르는 강물 위에서도 차분히 차를 달이던 그림 속 노인처럼 마음의 닻을 내릴 필요가 있다. 의욕 넘치는 시작일수록 서두르지 않고, 지금 이 계절이 주는 벅찬 기운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누려보자. 그게 이 찬란한 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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