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망명한 스탈린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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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던 딸, 스베틀라나 스탈리나.
아빠는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의 독재자였다.
"카플레르는 내 일생의 진짜 사랑이었다." 그런데 카플레르는 유대인이었고 스탈린은 유대인을 지독히 싫어했다.
첫 남편 모로조프도 유대인이었고 스탈린은 사위를 만나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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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던 딸, 스베틀라나 스탈리나. 아빠는 딸을 “참새”라 불렀고 편지에 “꼬마 아빠”라고 서명했다. 아빠는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의 독재자였다. 딸이 어릴 때 엄마는 남편과 싸우고 권총으로 자살. 자라면서 소꿉친구들이 사라졌다. 1930년대에 친한 가족들이 숙청된 것. “아빠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그때는 몰랐다.”
열여섯살에 영화감독 알렉세이 카플레르와 사랑에 빠졌다. “카플레르는 내 일생의 진짜 사랑이었다.” 그런데 카플레르는 유대인이었고 스탈린은 유대인을 지독히 싫어했다. 카플레르는 시베리아에 유형을 떠났다. 대학에서 그리고리 모로조프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첫 남편 모로조프도 유대인이었고 스탈린은 사위를 만나주지 않았다. 첫 남편과 곧 헤어졌다.
1953년 3월5일에 스탈린이 죽었다. 임종 현장에 있었다. “왼손을 들어 우리에게 저주를 내리듯 했다.” 1956년에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 비밀 해제 문서와 생존자 증언을 통해 스탈린 시대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났다. “더는 스탈리나라는 이름을 견딜 수 없었다.” 어머니의 성 알릴루예바를 따라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라는 이름을 썼다. 영어를 가르치고 영어 번역을 했다. 1963년에 인도 공산주의자 쿤와르 브라제시 싱과 사랑에 빠졌지만 당국은 결혼을 불허. 1966년에 싱이 숨지자 그의 유해를 갠지스강에 뿌리겠다며 인도를 방문. 1967년 3월6일에 결심을 굳혔다. 3월9일에 인도의 미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 소지품은 옷 몇벌과 회고록 원고뿐. 소련의 두 자녀와도 이별이었다.
소련 정부는 “정신 이상자”라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고민 끝에 망명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과 영국을 떠돌며 살았지만 네번째 결혼 역시 실패. “똑같은 바보들, 무능한 관료들, 의심과 편집증이 있더라.” 1980년대 중반에 소련에도 잠시 돌아왔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떠났다. 회고록은 많이 팔렸지만 정작 본인은 가난하게 숨졌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나를 따라다닌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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