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기획]학부모는 교문 밖 ‘동네’를 본다[광주 100년 도심학교 무너진다-3]

이서영 기자 2026. 3. 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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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공백 메꾸려 학원 밀집가 선호
정보력·면학 분위기 위해 학군지 거주
일대일 맞춤 교육에도 소규모 학교 기피

교육 당국 넘은 ‘정주 여건’ 복원 관건
"지자체·학교 ‘투트랙 협치’ 필요"
광주 근대학교의 시발지인 광주서석초등학교. 올해 신입생이 6명에 불과, 소멸위기를 맞고 있다. 서석초교의 학군지인 서남동 일대와 학교 주변에 주거지 대신 오피스, 상가들이 즐비하다. / 임문철 기자

학교 선생님들도 훌륭하시고 일대일 맞춤형 수업에 입학 장려금까지 준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육아 전쟁'이 시작돼요.

대단지 아파트처럼 학원 차량이 집 앞까지 오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안전하게 걸어서 갈 학원가도 이 동네에는 없거든요.

어느 부모가 여기서 아이를 키우겠습니까.

올해 초 광주 남구 봉선동으로 이사를 결정한 박지선(38)씨의 말이다. 박씨의 이사는 원도심 학교들이 직면한 '소멸 위기'의 본질을 관통한다. 학교가 교육 서비스의 질을 아무리 높여도, 통학이 편리한 주거 단지와 사교육 인프라가 붕괴한 곳은 젊은 부모들의 선택지에서 가장 먼저 제외된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학교 교실을 들여다보기 전, 이미 교문 밖에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학원가, 방과 후 '돌보미' 역할

초등생 자녀를 둔 학부모에게 학원 밀집지는 주거지를 결정하는 최우선 요소다. 사실상 '방과 후 돌봄 시스템'의 작동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오후 2시면 하교하는 아이와 저녁에 퇴근하는 부모 사이에는 '5시간의 공백'이 발생한다. 학원가 형성 유무가 주거지 선택의 절대적 잣대가 되는 이유다.

신도시의 경우 영어·태권도·음악 학원이 한 건물에 밀집해 있다. 전용 차량이 단지 앞까지 오고, 아이 혼자서도 학원 간 도보 이동이 가능하다. 맞벌이 부부에게 신도심 학원가는 거대한 '민간 돌봄 대체지'가 되는 셈이다. 반면 원도심은 이 시간을 메워줄 인프라가 전멸한 상태다. 학원가가 없는 원도심 학부모들은 매일 오후 직접 운전대를 잡고 아이를 실어 나르는 '셔틀 기사' 역할을 감내해야 한다. 학부모들이 육아 노동력을 아껴줄 인프라를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원도심 학부모 A씨도 비슷한 고충을 겪었다. 그는 "학교 생활 적응이 힘든 아이를 위해 세심한 케어가 가능한 소규모 학교를 선택했지만, 정작 하교 후가 문제였다"며 "집 근처에 보낼 학원이 전무해 매일 오후 아이를 차에 태우고 신도심으로 '뺑뺑이'를 돌아야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담이 컸다"고 토로했다.

◇'정보력+면학 분위기' 찾아서

학부모들이 학원 밀집가를 선호하는 이유는 이 뿐이 아니다. 학부모들에게 학원가는 거대한 '정보의 허브' 역할을 한다. 대형 학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입시 정보와 교육 커뮤니티는 원도심에서는 접하기 힘든 자산이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학원가 근처에 살아야 정보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학업 분위기의 상향 평준화도 무시 못 할 요인이다. 비슷한 교육열을 가진 가정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면학 분위기는 아이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김보영 광주학부모연대 대표는 "내 아이가 누구와 어울리며 어떤 자극을 받느냐가 교육의 핵심"이라며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드는 학원가 특유의 치열한 분위기 자체가 원도심 학교는 제공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라고 강조했다.

◇위험천만 등·하굣길?

'안전 격차' 역시 학부모들이 거주지를 고르는 중요 조건 중 하나다. 신도심처럼 계획된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살며 자연적으로 길이 형성된 원도심 특유의 '자생적 고밀 구조'가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과거 도심의 활기를 책임졌던 카센터, 철물점, 부속 상가 등 사업장들이 임대료가 저렴해진 골목 곳곳에 남은 점도 기피 요인이다. 아이들의 동선이 대형 차량의 잦은 이동과 분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구의 큰길 공인중개사사무소 김용희 대표는 "정비된 아파트 단지 내 '차 없는 보행로'를 갖춘 신도시와 달리, 원도심은 도시 계획 이전에 집들이 먼저 들어선 탓에 유모차 한 대 지나가기 힘든 좁고 굽은 골목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며 "사유지 보상 문제 등으로 도로 정비가 지연되면서 아이들에게 위험한 상황이 잦을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광주 동구에 위치한 원도심학교에 대해 학부모들은 교육인프라 부족을 아쉬움으로 꼽는다. 주변상권이 약해진 원도심 학교 일대. / 이서영 기자

◇'강한 내실' 불구 소규모 학교 기피

소규모 학교의 교육 만족도는 의외로 높다. 교사와 학생이 긴 시간 '라포(신뢰 관계)'를 쌓으며 밀착 맞춤형 수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학생 한 명을 면밀히 살필 수 있다는 점은 과밀학급 위주의 신도심 학교가 갖지 못한 최대 강점이다.

광주중앙초 김나래 교사는 "학생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고, 교사와 학부모가 보기에도 눈에 띄는 교육 성과를 내고 있다"며 "특히 세심한 지원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소규모 학교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내실 전략도 학부모들의 신도심행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적은 학생 수 자체가 기피 요인이기 때문이다. 부모들 사이엔 "또래가 많아야 사회성이 자란다"는 인식이 견고하다. 한 반 학생 수가 한 자릿수면 1학년 때 맺은 관계가 졸업까지 이어진다. 갈등이 생겨도 피할 곳이나 새로운 관계를 맺을 '대안 집단'이 전무하다는 뜻이다.

예비 초등생 자녀를 둔 학부모 이준형(41)씨는 "학교란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공간을 넘어, 또래 집단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성을 기르는 '작은 사회'다"면서 "아이들이 적으면 교사의 세심한 케어는 가능하겠지만,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배우는 사회성은 포기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교문 밖' 현실 앞에 119년 역사의 중앙초등학교는 전 학년 통합 문화예술 학습 등 파격적인 특성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사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배창호 중앙초 교장은 "학교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인근에 젊은 부부가 살지 않는 '취학 아동 전멸'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학교 혼자 이겨내기엔 역부족"이라고 토로했다. 이에 결국 학교 소멸을 막는 열쇠는 교문 안이 아니라 교문 밖 '살 만한 동네'를 복원하는 데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서영 기자 dec@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