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수도암은 가야산 북서쪽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의 경계에 우뚝 솟은 해발 1,317m의 준봉인 수도산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암은 청암사와 함께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1900년에 포응화상이 건물을 중수했다. 현재 수도암에는 보물로 지정 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동·서 삼층석탑,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김천 수도암은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인 청암사의 부속 암자이다. 현재의 명칭이나 위상만을 보면 작은 산내 암자일 것으로 지레짐작하기 쉽지만, 경내를 들어서면 그렇지 않음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창건 이후 지금까지 적어도 1,1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진 데다가 현재도 선승들이 선호하는 청정한 수행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대적광전·약광전·나한전·관음전 등 여러 전각까지 갖추어 제법 번듯한 사찰의 풍모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수도암은 859년(헌안왕3)에 뛰어난 선승이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827~898)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전승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김천 불영산에 쌍계사(하동 쌍계사가 아님)와 청암사를 세운 뒤 더 좋은 수행처를 찾아 이 자리에 왔는데, 터가 너무 좋아 춤을 추면서 "장차 백 대를 이어 전해질 도량으로 수많은 수행자가 나올 곳"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약광전 앞마당의 "창주 도선국사"라는 표석은 이런 전승을 뒷받침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수도암 대적광전 현판.
이곳의 지세는 풍수지리상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라 한다. 마당의 동서 양 탑이 베틀의 두 기둥이고, 대적광전 불상이 놓인 곳이 옥녀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라는 것이다. 하긴 문외한의 눈에도 그 지세가 범상치 않다. 대적광전 앞마당에 서면 정면 남쪽으로 가야산의 최고봉 상왕봉(1,443m)이 그 정수리를 내밀고 있어 마치 부처님이 멀리서 수도암을 내려다보는 듯하고, 해발 1,000m의 높은 고지에 자리 잡고 있어 맑은 공기와 적막함이 넘쳐난다. 이곳이 번뇌를 끊고 속세를 떠난 수도자들의 수행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아닐까 싶다.
창건 이후 수도암은 여러 곡절을 겪었지만 고려·조선시대에도 사격(寺格)을 유지해 왔다. 기록이 유실돼 자세한 사정을 알기 어려울 뿐이다. 근현대에 와서도 두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일본군이 농민군 소탕을 핑계로 사찰의 대부분을 불태워 거의 폐사의 위기에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1900년을 전후해 당시 주지였던 포응 스님이 일부 전각들을 중건하며 사찰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또 한국전쟁 직후에는 공비 소탕 작전 과정에서 또 한번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됐다. 1969년이 되어서야 나중에 조계종 종정을 지내는 현대 한국 불교의 거목 법전(1925~2014) 대종사가 주석하면서 차례로 중창이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여러 전각과 시설을 갖추었다. 그리고 법전 자신이 '절구통 수좌'라는 별호를 가질 만큼 철저한 수행승이었으므로 수도암은 참선 중심의 엄격한 수행 사찰이라는 전통이 수립되었다. 그래서 요즘도 하안거와 동안거 동안에는 전국에서 많은 수행승들이 수도암에 모여든다고 한다.
보물로 지정된 수도암 삼층석탑
◆수도암 동·서 3층 석탑(보물) 수도암의 주불전은 산자락의 비탈진 면을 평탄하게 다듬어 옆으로 나란히 세운 대적광전과 약광전이다. 두 법당의 앞마당은 자연히 남북 간의 폭은 좁고 동서로는 긴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마당에 2기의 화강암 3층 석탑이 서 있다. 대적광전 앞에는 서탑이, 약광전 앞에는 동탑이 서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법당과 탑의 거리는 가까운 반면 두 탑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지형적 특성상 불가피한 배치로 여겨지기도 한다. 양 탑은 모두 창건기인 9세기 중후반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돼 보물로 지정됐다.
약광전 앞의 동탑은 높이가 3.76m이다. 기단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각 면 한 개의 돌로 중석을 구성한 단층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 층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옥신의 4면에는 깊이 약 5㎝의 네모난 감실을 파서 그 안에 여래좌상을 돋을새김했다. 옥개석은 넓은 편이고, 옥개받침은 1·2층이 4단, 3층이 3단으로 서로 다르다. 탑의 기단 주변에 넓은 판석과 배례석이 있다.
대적광전 앞마당의 서탑은 높이가 약 4.25m로 동탑보다 클 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동탑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2층 기단이며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 돌로 되어 있고, 1층 옥신에는 각 면에 여래좌상 1구씩을 연화대 위에 돋을새김했다. 옥개받침은 각 층 모두 5단으로 이 또한 동탑과 다르다.
이 동서탑은 통일신라기 이래 유행했던 쌍탑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다. 우선 형식 자체가 다른 점이 많고, 두 탑간의 거리도 법당과의 거리에 비해 너무 멀다. 이에 축조 당시에 과연 쌍탑 형식을 염두에 둔 것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혹시 2곳의 법당 앞에 각각 따로 세운 탑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두 탑의 체감 비율이나 탑신부에 조각된 여래좌상과 장식 요소 등에는 통일신라 후기 석탑 양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 모두 9세기 중후반에 건립되었음은 분명하다.
수도암 대적광전에는 다른 절과 달리 보물로 지정 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수도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주불전인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석조 불상이다. 손 모양(手印)이 왼쪽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오른손이 주먹을 쥐고 왼손 집게손가락을 잡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어 비로자나불임을 쉽게 알 수 있다.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양식상 유사한 점이 많다. 광배는 망실됐다.
이 비로자나불은 신체 높이 251㎝, 두상 높이 70㎝로서 경주 석굴암 본존에 비길만한 보기드문 장대한 불상이다. 계측 자료에 따르면, 신체와 머리의 비례가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1:0.28이라고 한다. 다만 석굴암 본존에 비해 조각 수법은 조금 떨어져 위축되거나 탄력성이 줄어든 표현이 발견되고 편편한 콧잔등, 작은 입, 길게 늘어진 귀 등은 858년에 제작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양식적 특징과 닮아있다. 조각 수법 면에서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 석불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 비로자나불좌상의 제작 시기도 수도암 창건기인 9세기 중후반 전후로 추정해도 무리가 없다.
수도암 대적광전.
다만 이 불상은 당당한 상체에 비해 무릎 폭이 얕고 좁아서 불안정하고 위축된 느낌을 준다. 이런 불균형은 시대적 조각 수법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답사단 중 유득순 교수(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가 혹시 대좌의 높이가 원래보다 낮아짐에 따라 배례자의 시점이 높아져서 불상의 불균형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선입견을 떠나 충분히 숙고할만한 물음이 아닐까 싶다.
이 불상은 도선국사가 수도산 너머 경남 거창군 가북면 불석동에서 큰 돌을 골라 조각하였는데, 너무 거대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어 고심하던 중, 문수보살이 몸집 큰 노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불상을 들쳐업고 단숨에 산을 넘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장대한 불상의 크기로 인해 후대에 덧붙여진 전설일 것이다.
약광전에 봉안된 높이 1.54m의 대좌와 광배를 완전히 갖춘 보물 석조 보살좌상.
◆수도암 석조 보살좌상(보물)
약광전에 봉안된 석조 좌상이다. 높이 1.54m의 대좌와 광배를 완전히 갖춘 불상으로 그 조각 수법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좌상의 성격에 대해 머리 위에 문양 없는 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주류이지만 광배와 대좌 형태, 양손을 모아 보주(혹은 보병)를 든 모습 등의 요소에 주목하여 약사불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다.
수조암 약광전.
얼굴 모습은 단정하고 온화하며 머리 위에 원통형의 관을 쓰고 있다. 보관은 같은 시대에 제작된 강릉 신복사지 보살좌상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가는 눈, 비교적 오뚝한 코, 두툼한 입술, 팽창된 뺨은 마치 우리 이웃을 보는 듯 매우 친근감이 있다. 이 보살좌상(혹은 약사여래상)은 양식적 측면에서 금오산 약사암과 직지사 삼성암의 약사여래불과 비슷한 점이 많아 불가에서는 이들을 3형제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곳의 석불이 재채기를 한다는 믿기 어려운 설화까지 전해진다.
약광전 앞마당, 사람 키 높이 정도의 석주가 서 있다.
◆「刱主 道詵國師」 표석은 원래 신라 비석일까.
약광전 앞마당, 동탑과 서탑의 가운데 쯤에 사람 키 높이 정도의 석주 하나가 북향으로 서 있다. 약광전을 향한 전면에 '창주 도선국사(刱主 道詵國師)'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암자를 개창한 인물이 도선국사임을 알리는 일종의 표석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명문이 새겨진 면에 표석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석주의 한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쪽을 조금 깊게 다듬었으며 거기에 희미한 글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육안 조사와 탁본 작업을 통해 여기에는 표석 명문과 크기 및 서체가 전혀 다른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확인했다는 보고가 나왔다.(박홍국, 「김천 수도암 신라비의 조사와 김생 진적」 신라사학보 46, 2019) 보고자는 여기서 약 50여자가 판독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마멸이 심하지만 '비로자나불상(毗盧遮那佛像)', '원화3년(元和三年;808)', '김생서(金生書)' 등 중요한 글자들이 판독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 표석은 원래 신라의 명필 김생의 친필을 새긴 신라 비석이며,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된 808년(애장왕9) 경에 세워졌다는 파격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사실이라면 경천동지할 새로운 신라 금석문자료가 출현한 셈이 된다.
수도암에서 바라본 가야산 전경.
그래서 이번 기회를 빌려 표석을 공들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필자의 육안으로는 희미한 자획의 흔적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고, 한 글자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판독 자체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게다가 보고자의 김생 친필 비석이라는 주장은 삼국사기 김생 열전의 출생 시기(711년)와 비석의 건립 시기 사이에 괴리가 크고, 비문상 글쓴이가 새겨진 위치도 통일신라기 비석의 관례와 너무 어긋나서 그대로 따르기가 주저된다. 앞으로 심화된 조사·연구를 통해 실체가 해명되기를 기대한다. 이문기 경북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