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 임신중지 '살인' 판단 이유… 법원 "입양 등 대안 노력 없었다"

장수현 2026. 3. 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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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 심박 듣고 생존할 수 있다 인지"
수술 과정 몰랐어도 '살인 고의' 인정
2019년 산모 처벌 면한 판례와 반대
"7년 넘도록 법 공백 방치한 국가 책임"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 정다빈 기자

법원이 36주 차 태아를 임신중지한 산모에게 살인죄를 인정했다. 태아의 상태, 수술 방식, 입양과 같은 대안 등을 '알아보지 않은 잘못'에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회가 '낙태죄' 대체 입법 의무를 외면해 위기 임산부의 책임이 커지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 이진관)는 산모 권모씨에게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면서 ①태아가 배출 후 생존할 수 있다고 인지했는지 ②수술 후 태아를 사망하게 한다고 인식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따졌다. 그리고 재판부는 권씨가 이들 두 가지 사항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판단, 유죄를 선고했다.

쟁점 ①과 관련해 재판부는 권씨가 임신중지 수술 전날 다른 병원에서 "태아의 심박이 정상이다"라는 설명을 들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후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기 때문에 태아가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권씨가 인지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뒤늦게 임신을 알게 돼 피임약도 먹고 음주, 흡연까지 해서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고 우려했다"는 권씨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쟁점 ②는 가장 다툼이 첨예한 사안이었다. 언제 태아가 사망했느냐에 따라 살인죄 적용 여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는 제왕절개 수술에서 태아가 모체 밖으로 완전히 나왔을 때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권씨가 "제왕절개술의 경우 태아를 모체 안에서 사산시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즉, 의료진이 출생한 태아(사람)를 사망하게 할 가능성을 인지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물론 권씨가 구체적인 수술 과정을 몰랐을 가능성까지는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가 갖는 법적 의미에 대해 무관심할수록 고의가 인정되지 않아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게 된다는 논리는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여기에 "피해자(태아)를 출산해 입양 보내는 등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권씨에게 불리한 양형 요소였다.

다만 이 같은 판단이 앞선 판례와 상충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9년 서울고법은 임신 34주 차에 제왕절개로 임신중지한 산모에게 영아살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의료진이 수술 전 산모를 마취했던 사정 등을 고려, "(산모는) 태아가 살아서 출산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업무상촉탁낙태죄로 기소됐던 의사도 2019년 4월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근거해 무죄를 받았다. 그 이후 국회에서 대체 입법을 하지 않아, 형법상 임신중지 처벌 규정은 현재 공백 상태다.


"입법 공백 방치한 정부도 책임"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회원들이 2021년 3월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임신중지를 공적 의료서비스로 보장하는 데 필요한 건강보험 적용과 유산 유도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이번 재판이 입법 공백으로 위기 임산부의 책임만 커진 현실을 방증한다고 비판했다. 명확한 법적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임산부에게 직접 태아의 상태, 구체적 수술 방식, 입양 등 대안을 알아봐야 한다는 부담을 줬기 때문이다.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국회가 별다른 개선입법을 하지 않아 임신한 여성이 언제까지 어떠한 사유로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관한 규범적 공백과 혼란이 발생했다"며 "범행 가담 경위에 참작할 만한 사정"이라고 명시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최안나 대한의료정책학교 교장은 "위기 임산부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되긴커녕 입법 공백을 틈타 비의료인 불법 시술까지 흔해졌다"며 "국회가 여성과 태아의 건강권 모두 위협받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는 5일 논평에서 "사산 처리 방식과 의료 절차를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 고의를 인정한다면 임신중지 비범죄화 이후 7년이 지나도록 관련 의료 가이드를 마련하지 않은 정부야말로 사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장수현 기자 jangsu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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