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반군, 이란 지상전? …트럼프, 대리전 동원하나
공습 만으로 정권붕괴 어렵다 판단 가능성
헤그세스 "이란 봉기세력에 무기 제공 안해"
트럼프는 1일 쿠르드 지도자들과 전화통화
수천년 중동 곳곳 떠돌며 박해받은 소수민족
시리아 IS 격퇴 도왔다가 트럼프에 배신 당해
그럼에도 독립국가 위상 찾으러 나섰을 수도

이라크 북부에서 이란 신정체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해 오던 쿠르드족 민병대원 수천 명이 이란 영토에 진입했다고 미국 폭스뉴스가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전투원 중 많은 수는 이라크에 여러 해 거주해 온 이란 쿠르드족이며, 이번 공격작전의 일환으로 이란 북서부 옛 터전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앞서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반(半)자치구역인 쿠르디스탄에서 활동하는 쿠르디스탄자유당(PAK)의 관계자 칼릴 나디리는 AP통신에 이 단체 병력의 일부가 술라이마니야 주의 이란 접경지역으로 이동해 대기 중인 상태라고 말했는데 폭스뉴스의 보도가 맞다면 이미 국경을 넘었다는 얘기가 된다. 닷새째 이스라엘과 손잡고 이란 공격에 나섰던 미국이 국가 없이 중동 곳곳에 흩어져 독립을 염원하던 쿠르드족을 대신 내세워 지상 공격작전에 들어간다는 뜻이 된다.
이들은 이란계 쿠르드족으로 구성된 민병대로서 이란 정권에 맞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한 발 나아가 독립국가의 위상을 찾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란이 이미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에 허덕이고 있는 만큼 이들의 개입 수위에 따라 전쟁 양상에 상당한 변수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군 차원에서 이란 내 봉기 세력에 무기를 제공하지는 않고 있다고 밝혔다. 헤그세스 장관은 "우리(국방부)의 목표는 특정 세력에 대한 지원이나 무장 제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며 "따라서 다른 주체들이 무엇을 하는지 인지하고 있지만, 우리의 목표는 그것이 중심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언론은 헤그세스 장관의 발언을 국방부가 아니라 중앙정보국(CIA)와 같은 해외 작전기관이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으로 받아들였다. CNN 방송은 CIA가 이란 내 봉기 유도를 위해 쿠르드족 민병대를 무장시키는 작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이란의 반정부 집단들과 이라크 내 쿠르드족 지도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 쿠르드족 단체들에 대한 CIA의 지원은 전쟁 발발 몇 개월 전에 시작됐다고 한 소식통과 쿠르디스탄 지역 정부 고위 관계자가 방송에 설명했다.
이스라엘은 더욱 분명하게 이란 신정체제의 붕괴를 촉진할 반란을 촉발할 목적으로 쿠르드족과 손을 잡았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정부 당국자는 "우리(이스라엘)는 이란서부에서 활동하는 쿠르드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며 민병대가 이란 내 일부 지역을 장악해 정권에 도전하도록 해 더 광범위한 봉기를 유도하는 것이 지원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지난 1일 쿠르드족 지도자들과 전화통화
눈길을 끄는 대목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쿠르드족 지도자들과 통화한 사실을 백악관이 4일 확인한 것이다. 다만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통화의 목적이 이라크 북부에 있는 미군 기지와 관련한 것이었다면서, 이란의 체제 전복을 위해 미국이 쿠르드족 무장세력을 지원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통화였다는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레빗 대변인은 또 트럼프 행정부가 쿠르드족 세력에 무기를 제공하기로 했다는 보도 역시 부인했다.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일 쿠르드족 지도자들과 접촉했으며, 이들 무장 세력에 무기 및 군사훈련 지원과 정보 지원을 할지와 관련해 최종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고 전날 보도했다.
이란계 쿠르드 무장단체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일대, 그 중에서도 주로 이라크 쿠르디스탄 자치구 지역에서 수천 명의 병력을 운용하고 있다.
이들 단체 중 몇몇은 지난달 28일 이란 전쟁 발발 이후 공개 성명을 내고 임박한 행동을 암시하면서 이란 군인들에게 이탈을 촉구해 왔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쿠르드족 단체들을 공격해 왔으며, 지난 3일에는 드론 수십 대로 쿠르드 세력을 폭격했다고 밝혔다.
파편화돼 있어 단결이 잘 되지 않는 이란의 반정부 그룹들 중 쿠르드족 단체들은 가장 잘 조직돼 있을 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무장 병력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란과 이라크에 흩어져 있던 쿠르드족 집단들이 이란 전쟁에 가담한다면 본격적 지상전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쿠르드족 민병대는 이슬람국가(IS)와의 충돌로 상당한 전투 경험까지 갖추고 있다.

공습 만으로 정권 교체 안돼 약소민족을 총알받이로
만약 미국이 쿠르드족에 무기를 지원해 그들을 이란으로 투입하려 하는 것이 맞다면 결국 공습만으로는 이란과의 전쟁을 매듭짓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특히 지상군 투입은 이란의 정권교체 시도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공습을 통해 이란 최고지도자였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잔당까지 제거해 친미 성향의 새 정권을 수립하는 일은 지상군 투입 없이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차례 미군의 공습이 끝나면 이란 국민들이 이란 정부를 점령하라고 촉구했지만, 이란 시민사회가 그만큼 조직화돼 있지 않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쿠르드족의 힘을 빌린다면 그것은 상당한 미군의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지상전 수행을 쿠르드족이 대신하는 상황을 의미할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헤그세스 장관 등은 미 지상군의 이란 파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날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미국이 이란에 지상군 투입을 검토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현재 시점에서 이 작전 계획의 일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의 대외 군사개입을 자제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며 2016년과 2024년 두 차례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와 그를 지지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세력은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같은 장기적 소모전으로 미군이 수천명씩 사망했던 과거를 매우 끔찍한 일로 기억한다.
미군이 이란 공습을 개시한 이후 현재까지 병사 6명이 사망한 상황에 지상군 투입시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미군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된다.
트럼프 2기 '후반'의 국정 동력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지상군 투입처럼 지지층의 분열을 가져오고 커다란 리스크가 되는 선택을 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이 쿠르드족의 힘을 빌리는 길을 택한다면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며 이란의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한 고육지책이란 평가를 들을 만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독립국가를 염원하며 중동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약소 민족의 힘을 빌려 이란 정권을 타도하려는 것이어서 상당한 문제와 부작용을 낳을 것으로 우려된다.
이미 미국은 2010년대 이슬람 극단세력인 이슬람국가(IS) 소탕전 과정에서 쿠르드족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트럼프 1기때 시리아에 주둔하던 미군이 시리아 내 쿠르드족 민병대인 시리아민주군(SDF)과 함께 IS 퇴치 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10월 쿠르드족이 장악한 시리아 동북부 지역에서 미군 철수 방침을 발표해 IS 격퇴를 도운 쿠르드족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쿠르드족 속담에 "산 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
쿠르드족은 산악 민족으로 이들은 이란인들이 쓰는 페르시아어와 상당히 비슷한 언어를 쓰지만, 각국에서 소수민족으로 박해와 탄압을 견디면서도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간직하며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중동 분쟁이 벌어질 때는 서방의 파트너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전략적 가치가 다하면 번번이 버려지는 비운의 역사를 반복하기도 했다.
시작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1920년 서방 연합국은 세브르 조약을 통해 쿠르드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가, 3년 뒤 로잔 조약에서 이를 뒤집었다. 이후 쿠르드족 거주지는 네 갈래로 분리됐으며,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 시도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때도 쿠르드족은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보낸 튀르키예(터키)의 국기를 달고 참전했다. 당시 튀르키예 참전용사의 과반이 전공을 세우면 독립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쿠르드족이었다는 추산도 전해진다.
쿠르드족은 각국의 전쟁에 휘말려 난민이 되거나, 전쟁범죄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특히 1987년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라크 정부군으로부터 화학 가스 공격을 받아 약 18만명(쿠르드족 자체 추산)이 학살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시리아에서 IS와 맞서다 트럼프에게 배신 당해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산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쿠르드 속담을 인용해 "역대 미국 행정부들이 쿠르드족을 포용했다가 배척했던 쓰라린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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