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불안을 끌어안는 사랑과 응원의 노래, 뮤지컬 '렌트'

박진서 2026. 3. 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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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진서-고전의 막이 오르면
뮤지컬 《렌트》
1996년 1월 26일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
여전히 시대와 호흡하며 '지금, 여기' 감각과 연결된 작품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던 《렌트》가 또 한 번의 막을 내렸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렌트》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였던 1996년 1월 26일이 공연 기간에 포함되어 있어 더 큰 의미를 남겼다. 30년의 시차를 넘어 여전히 유효한 힘을 가진, 또 하나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렌트》는 그 자체로 고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추운 겨울날을 견디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인공으로 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은 조나단 라슨을 통해 1991~1992년의 뉴욕을 살아가는 여러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오페라가 담고 있는 ‘보헤미안들’의 이야기는 《렌트》의 1막 마지막 노래인 ‘La Vie Boheme(보헤미안의 삶)’으로 이어지고, 극 중 작곡가로 등장하는 로저의 노래 또한 ‘뮤제타의 왈츠’의 오마주로 활용된다. 1896년에 초연한 《라 보엠》과 《렌트》의 초연이 정확히 100년을 터울로 탄생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연결고리다.

뮤지컬 <렌트>(2025) 공연 장면 (La Vie Boheme) / 사진. ©신시컴퍼니

조나단 라슨이 이 작품을 만들었던 1990년대 당시, 《렌트》는 매우 동시대적인 작업이었다. 《라 보엠》이라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젊은 보헤미안들의 모습으로부터 자신과 함께 뉴욕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투영한다. 빈곤과 마약, AIDS와 질병, 그리고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 열정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견뎌낸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작업은 일종의 ‘시대극’처럼 다가온다. 1991년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배경으로 한 1막에서 그다음 해 크리스마스를 향해 나아가는 작품의 장면들은 매우 구체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진행된다. 이야기의 공간 또한 맨해튼 이스트빌리지 뒷골목의 어느 낡은 아파트와 AIDS 환자들의 자조 모임, 공터에서 벌어지는 재개발 반대 집회와 펍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뉴욕 이면의 곳곳을 면밀히 들여다본다. 실제 뉴욕에 거주하며 작품을 만들었던 조나단 라슨의 삶이 반영된 것이다.

어떠한 작품이 동시대적인 디테일을 담아낸다는 것은 때때로 특정한 시대에 고정시킨다는 위험성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렌트》는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관객들을 열광시킨다. 과거의 명작을 넘어, 오늘날의 관객들이 각자 경험하는 삶의 맥락과 맞닿아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내일의 두려움 대신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No Day But Today’) 함께하는 이들과의 사랑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돌이켜보자고 말하는(‘Seasons of Love’) 보편적인 메시지도 한몫을 한다. 하지만 전혀 다르게만 보이는 지금, 여기의 세계가 《렌트》 속 세계와 닮아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뮤지컬 <렌트>(2025) 공연 장면 (Seasons of Love) / 사진. ©신시컴퍼니

특히, 2020년 이후 이어진 세 번의 시즌은 《렌트》가 여전히 동시대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렌트》가 비교적 최신작이었던 2000년에 예술의전당에서 한국 초연이 이루어진 후 10여년간 거의 매해 공연이 이루어졌지만, 2011년 시즌을 끝으로 한국 공연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020년에 다시 한번 렌트는 새로워진 모습으로 관객들을 만났고, 이후 2024-25년과 2025-26년이라는 세 번의 시즌으로 이어졌다. 10년에 가까운 공백기에도 관객들은 여전히 《렌트》에 열광했고, 이것이 결국 다시 《렌트》를 극장으로 호출한 셈이다.

2020년, 한국어 프로덕션 20주년을 기념하며 소식을 알렸던 《렌트》는 여러 차례의 위기를 맞았다.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공연은 존재론적 위기를 경험했고, 그럼에도 《렌트》는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한 좌석씩 띄어 앉은 한 좌석 띄어 앉기라는 최후의 수단과 함께, 재개발 반대 집회 장면에서의 함성은 박수로 대체되어 공연이 이루어졌다. 뮤지컬계의 확진 사태로 인해 마지막 공연이 취소되어 폐막이 예상치 못하게 하루 앞당겨지기도 했다. 바이러스가 만들어내는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질병과 혐오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던 우리에게 《렌트》는 다시 한번 사랑으로 그 시간들을 이겨낼 힘을 노래했다.

뮤지컬 <렌트>(2025) 공연 장면 (Santa Fe_콜린(황건하), 마크(양희준), 엔젤(조권)) / 사진. ©신시컴퍼니

2023년, 엔데믹 이후 다시 만난 《렌트》는 또 다른 지점에서 한국 사회와 연결되었다.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경제부양책과 경제적인 격변, 그리고 그 속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된 투자 열풍은 팬데믹 이후에 또 다른 방식으로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이 시기의 부동산 시장을 둘러싼 문제들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는데, 이것은 집세를 낼 돈조차 없는 가난 속에 ‘세상 모든 건 다 빌려 쓰는 것’(‘Rent’) 이라 말하며 저항하는《렌트》가 집세라는 뜻의 제목처럼 부동산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특히 재개발 반대 집회에서의 퍼포먼스를 계기로 모린과 마크가 주목을 받고, 부동산 사업가의 딸과 결혼한 베니가 다른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갈등은 이러한 지점들을 부각시킨다. 여기에 더해 당시 예술 분야의 실질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상황이 맞물리며, ‘K-컬쳐’의 세계적인 성공 이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예술가들의 빈곤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세계 문화의 중심지라고도 불리는 뉴욕의 뒷골목을 비췄던 《렌트》의 시선이, 한국 문화산업의 이면을 다시 한번 조명한 셈이다.

2025년과 2026년 겨울을 함께한 《렌트》의 이야기는 어떻게 지금, 여기의 관객들에게 와닿았을까. 《렌트》가 가진 미덕 중 하나는 어느 누구를 비난하거나 악역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그 속에서 치열하게 갈등하고 때로는 상처를 입힌다. 또한 누군가는 스스로가 비판했던 현실과 타협한다. 친구들과 더 나은 집에서 작업을 하고 싶은 베니는 재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친구들에겐 그저 경제적인 이익을 좇는 속물일 뿐이다. 재개발 시위를 촬영한 다큐멘터리의 주목 이후 라디오 DJ의 기회까지 얻게 된 마크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뒤로한 채 자신과 맞지 않는 방송을 진행하는 상황에 자괴감을 느낀다.

하지만 《렌트》는 그 중 어느 누구를 원망하거나 잘못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저 어려운 세상 속에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며, 그것을 존중하며 나아가는 일이 사랑이라고 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것이다.

뮤지컬 <렌트>(2025) 공연 장면 (Rent_마크(양희준), 로저(유태양)) / 사진. ©신시컴퍼니

이것은 지난 2024년과 2025년에 공연된 라슨의 또 다른 작품 《틱, 틱… 붐!》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의 유작이자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뮤지컬 작곡가로 데뷔를 꿈꾸는 존과 배우를 준비하는 수잔, 그리고 배우의 꿈을 버리고 마케팅 회사의 임원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둔 마이클의 이야기를 나란히 보여준다. 세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오해하며 나아가고, 그 끝에서 노래한다. 새장과 하늘 중 새에게 필요한 것은 새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Louder than words). 꿈을 좇든(하늘) 현실과 타협하든(새장), 자신이 그 상황을 돌파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우열도 없다는 뜻이다. 《틱, 틱… 붐!》과 《렌트》를 나란히 함께한 관객들에게는 이 모든 삶의 선택들이 각자의 최선이었다는 응원으로 다가온다.

별다른 고용 활동 없이 ‘쉬었음’이라고 응답한 2~30대 청년이 70만명을 넘기며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었다. 누군가는 구조의 문제를 말하고, 청년 세대의 심리적 변화를 말하며, 제각기 다른 해결책으로 이 문제를 돌파하고자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작정 ‘쉬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쉬었음’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내재한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하고 각자의 선택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아닐까. 《렌트》는 그렇게 꿈과 현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가능성들을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우리 사회를 거울처럼 비춰 보인다.

뮤지컬 <렌트>(2025) 공연 장면 (I'll Cover You_콜린(장지후), 엔젤(황순종)) / 사진. ©신시컴퍼니

《렌트》의 초연 하루 전인 1996년 1월 25일, 공연을 보지 못한 채 3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라슨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 특히 뮤지컬로서는 흔치 않게 퓰리처상까지 수상하며 평단의 인정을 받은 《렌트》의 작품성과 그것이 남긴 영향력을 돌이켜볼 때, 사람들은 또 한 명의 천재를 잃었다는 생각과 함께 라슨을 추억한다. 게다가 유작으로 남은 《틱, 틱… 붐!》마저도 이후의 각색을 통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때때로 그가 이후에 탁월한 작업들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렌트》가 여전히 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작품으로 남아있다고 느낄 때면, 라슨도 지금 여기서 함께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이 어떠한 각색이나 재창작을 넘어서 그 자체로 여전히 지금, 여기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이 가진 힘을 곱씹어 보게 된다. 《렌트》는 그렇게 우리 사회의 불안과 두려움에 끊임없이 연결되며 또 하나의 고전이 되어간다.

언젠가, 부디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우리를 찾아올 《렌트》와 함께 연결될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렌트》가 안겨준 사랑과 위로, 응원과 격려의 마음을 안고서.

박진서 작가•연극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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