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읍성 두고 동학농민군·일본군 치열한 전투

경북도민일보 2026. 3. 4.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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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벨트를 가다
‘포항사람 해월 최시형’ 유적지 답사-구미 선산
선산읍성 남문 낙남루 전경.
갑오전쟁선산창의비.
갑오농민군선산읍성 전적비.
선산갑오전쟁전적지 안내문.
선산객사.
선산읍 삼층석탑앞 1894년 동학농민혁명 기념비석들.
김상조 역사문화답사가

일본은 갑신정변 후 청, 일간 맺은 텐진조약을 빌미로 5월 초 조선에 군대를 보낸다. 조약 내용은 조선에 중대한 사건이 생겨 한 국가가 군대 파병 시 사전 상대 국가에 알린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군을 요청한다. 그리고 청군이 출병하자 일본군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이튿날 출병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한양까지 전선 가설과 병참기지 설치를 서두른다. 청국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병참기지는 낙동강을 따라 부산~구포~삼랑진~물금포~밀양~청도~대구~다부역~낙동~해평~태봉~문경에 이르렀다. 기지에는 일본군 주둔은 물론 무기 등 막대한 군수물자와 군량이 비축되고 있었다.

경상도 중북부 동학농민군 활동은 일본군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로 낙동강 주변 선산, 상주, 예천 등지다. 일찍이 동학 포덕이 이뤄져 도인들이 많은 고을들이었다. 경상도는 300여 년 전 임진왜란으로 처참한 화를 당했다. 이에 어느 다른 지방보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돼 있었다.

그러나 동해안과 태백산맥 일원은 1871년 영해 무장봉기이후 동학조직이 관군에 의해 거의 궤멸된 상태였다. 이에 반봉건 동학농민군 활동은 미미했다. 그러나 중북부는 충청도 옥천과 금산, 황간, 보은 등지와 지리적으로 가깝다. 이에 동학 세력의 움직임은 지호지간이었다. 일본군 보급과 통신 요충지 병참기지들도 가까웠다. 일본군의 전쟁준비 상황이 눈앞에 목격됐다. 이미 적개심을 품고 일본군 시설을 간간이 공격하기도 했다. 주로 전선 절단과 일본군 척후병 사살 등이었다. 일본군으로서는 병참기지가 언제 공격받을지 늘 불안이었다. 이에 오히려 동학세력이 강한 고을은 기습공격 등으로 위축시키고자 했다.

일본군은 경상도 해평 현 쌍암고택, 낙동 현 낙동파출소 두 곳에 병참기지를 설치한다. 쌍암고택은 주인이 동학농민혁명 와중에 합천으로 피난을 떠나 일본군이 주둔지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병참기지 주두군 주 임무는 낙동강을 따라 무기와 식량을 날라 비축하는 일이었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본 선산 일대 각 접주들은 7월부터 활동에 들어간다. 그리고 해월 최시형의 총기포령이 닿자 9월 20일 선산읍성을 점령한다. 그런데 달아난 선산관아 향리들이 몰래 일본군 병참기지에 지원을 요청한다. 일본군은 10월 1일 선산읍성을 공격한다. 그런데 병참기지뿐만 아니고 부산수비대에서 온 후지타 부대가 가세한다. 후지타는 8월 29일 낙동 병참기지에 도착해 있었다. 수비대는 하사 4명, 병졸 60명, 통역 2명, 인부 10명 등이었다. 이들은 9월 29일 동학농민군 점령지 상주읍성을 공격, 탈환에 성공한다. 이들과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은 15명 이상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중과부적과 무기의 열세가 패배의 원인이었다.

선산읍성 전투를 이끈 동학 지도자는 선산포 접주 신두문, 한교리와 아들 한정교 부자, 김정문, 한문출 등이 손꼽힌다. 신두문은 '거괴(큰 우두머리)'로 불릴만큼 동학 중요 지도자였다. 그는 전투 패배 후 몸을 숨긴다. 그러나 결국 붙잡혀 12월 14일 상주 소모사 정의묵에게 총살형을 당한다.

한교리 부자는 해평 병참기지 무기탄약고를 급습한다. 그리고 선산읍성 공격과 선산관아 공격에도 앞장선다. 김정문은 양반의 놀이터 감호정 관리직이었다. 그는 김산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선산읍성 공격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한문출은 일본군이 선산읍성을 점령한 뒤 통문을 돌려 동학농민군을 조직, 11월초 재봉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이 부인을 붙잡아 편지를 들려 보내 항복을 회유했으나 그는 눈앞에서 찢어버리며 이를 거절한다.

선산읍성은 일본군과 관군이 점령한 뒤 재공격과 탈환이 요원해진다. 그러자 이 일대 항전 전은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대구 경상감영은 관군 2백 명을 파견한다. 선산, 김산, 지례, 개령 일대 동학농민군 색출에 나선 것이다. 이에 동학조직은 크게 위축되고 동학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진다.

선산읍성 남문 낙남루앞에는 '갑오농민군선산읍성전적비'와 '갑오전쟁선산창의비' 등 비석 4기가 서 있다. 선산갑오농민전쟁유족회 등이 당시 항전을 기념해 2016년 4월 세운 비석들이다.

김상조 역사문화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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