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춤추는 바다, 사유하는 몸
세상과 교감하는 순간
노영재 춤비평가·신라대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파도가 넘실대며 춤을 춘다. 무심코 자주 쓰는 말이지만 막상 바다 앞에 서면 그 표현이 단순한 비유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쉼 없이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 바다는 한순간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과 리듬을 만들어 낸다. 해양인문학이나 블루휴머니티즈와 같이 바다로 향하는 인문학의 시선은 인간이 발을 딛고 있는 육지의 관점에서 세계를 익숙하게 판단하는 습관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예로부터 해양예술은 바다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삶의 의미를 예술적인 표현으로 담아왔다. 특히 시·소설·회화 속 바다는 고뇌와 투쟁, 정화와 치유의 감정을 환기하며 상상과 감동을 전한다. 그렇다면 춤에 깃든 바다는 어떤 감각과 사유로 마주할 수 있을까.
무대에서 바다는 오랫동안 재현의 대상이었다. 고전적인 예로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발레 ‘해적’이 있다. 바이런의 서사시 ‘해적’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문학 속 파괴적이고 우울한 ‘바이런적 영웅(byronic hero)’을 순화시키고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중심으로 이국적인 낭만주의 정서를 발레화한 작품이다. 19세기 프랑스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는 이 발레의 피날레인 난파 장면에서 얻은 강렬한 인상을 한 폭의 역동적인 그림으로 남겼다. 이 시기 발레는 낭만주의의 환상과 고전주의의 형식미가 결합하면서 무대 기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고조되고, 사상적으로는 바다가 예술적 주제로 부상하던 시기와도 맞닿아 있다.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난파하는 장면을 무대 위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되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주역 무용수들의 절망적 연기 못지않게 무대 연출은 관객에게 장엄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숭고의 감각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스펙터클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에까지 눈을 돌린 것이다. 번개와 폭풍이 치는 격랑의 파도 속으로 가라앉는 배는 ‘극한의 눈부심’ ‘무대 연출의 가장 성공한 기적’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으며 공연 전체를 압도하는 시각적 절정으로 기억되었다.
20세기 바다는 춤의 탐구 대상으로 변모한다. 바람 파도와 같은 자연의 리듬이 몸에 스며든 시기이기도 하다. 클래식 발레가 화려한 스펙터클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일례로 미국 현대무용의 대가 도리스 험프리는 ‘물 연구(Water Study, 1928)’라는 작품을 통해 물의 리듬과 에너지를 신체로 구체화하는 데 몰두했다. 말 그대로 ‘몸으로 탐구하는 물’ 그 자체였다. 음악 의상 연출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움직임에 집중한 이 작품은 얼핏 소박해 보인다. 그러나 외형의 모방을 넘어 파도의 다채로운 리듬적 속성과 에너지를 몸의 들숨과 날숨, 상승과 하강이 유기적으로 연계된 집단적 움직임으로 담아냄으로써 자연의 리듬이 예술적인 춤으로 승화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하였다.
동시대 기술 진화 속에서 춤은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이 주는 감각을 집요하게 탐구하기도 한다. 바다의 인상을 극화하고 리듬을 체화하는 작업에서 나아가 심해의 정서적 경험, 즉 신비와 공허가 행위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다. 영국 컨템포러리 안무가 웨인 맥그리거는 심해 해파리 종을 주제로 한 신작 ‘딥스타리아(deepstaria)’로 해외 순회공연 중이며 3월 말 내한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맥그리거의 오랜 관심은 ‘신체적 사고(physical thinking)’를 통한 몸 사용법의 전환에 있다. ‘습관적’ 움직임의 고리를 끊고 불편함과 비정형성을 통해 전통적인 재현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는 AI 기술과 특수 소재를 활용하여 블랙홀 같은 심해 공간을 조성하고, 극한 어둠 속에서 유영하는 무용수들이 기이하게 변형된 신체 감각을 보여줌으로써 무한함과 불확실성에 대한 몸의 경험을 구현한다.
무용학자 수잔 포스터는 ‘고용된 몸(The hired body)’이라는 개념을 통해 춤 테크닉에 종속된 몸을 비판한다. 여기서 춤 테크닉이란 미학적이든 공학적이든 예술가가 하나의 신념이나 시스템에 헌신하며 의도를 지니고 인위적으로 구축한 체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은 전문 무용수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오랜 습관 환경 직업 등에 의해 몸은 길들여지고 체계 속에 묶여 있음에도 이 몸을 인식하고 성찰하는 일은 드물다.

바다는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오지만 안전하고 익숙한 시선을 뒤흔들고 끊임없이 반응하는 존재의 감각을 깨워주기도 한다. 봄이 무르익으면 해변에서는 공연이 이어지고 춤추는 사람들이 ‘풍경’처럼 다가올 것이다. 이번엔 바다를 따라 걸으며 파도 소리에 ‘몸’을 맡겨보자. 모래 위 흔들리는 발바닥과 상쾌한 바람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세계 속에 놓인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몸은 춤추는 동시에 사유하고 사유는 다시 몸의 리듬이 되며 그렇게 자연과 교감하는 자기만의 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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