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talk)!세상] 단종과 노산군 그리고 영월 장릉(莊陵)을 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천만 목전
삼대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에도
목숨 걸고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역사의 진실’ 밝혀지는 시간 몰라


왕은 살아 궁에 죽어 능에 영혼은 종묘에 모신다. 하지만 조선 왕 중 살아 궁궐에 있었으나, 상왕에서 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분이 있었다. 569년 전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영월 관풍헌에서 죽었다. 요즘 천만 관객이 찾는 ‘왕과 사는 남자’가 인기다. 어린 단종과 숙부 수양대군 그리고 호장 엄흥도가 역사 속에서 현실로 다가왔다. 50년 전 역사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500여 년 전 역사가 현실이 되었다.
천만 관객은 영화를 통해 울고 웃고 감동하며 역사 속 현장으로 가고 있다. 영월은 멀다. 당시 영월은 더 험난하였다. 도성 밖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 송씨와 하룻밤을 보낸 후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영 이별을 고한다. 광나루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한강을 거슬러 갔다. 유람이 아니라 유배다. 배 타고 걸어서 영월 주천에 머문다. 노산군으로 물길과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걷다 물 마시고, 이틀 사흘 밤 지새고 나흘 닷새째 또 걸었다. 해 질 녘 배일치에서 마지막 절을 한다. 엿새째 선암에서 바라본 육지 속 섬 청령포(淸泠浦)를 보았다.

삼면이 강이요, 북면이 절벽인 고도의 섬은 위리안치보다 더 가혹한 곳이었다. 영월 동강 건너 임금이 머물 처소엔 사람이 없다. 관음송과 소쩍새 한 마리가 어린 노산군의 유일한 벗이자 의지할 친구였다. 아버지 문종이 죽고, 어머니 현덕왕후도 산후병으로 가셨으니, 단종은 삶 자체가 외로웠다.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까지 세상에 없으니 적장손 단종은 혈혈단신이었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그를 후원한 종친일뿐….
단종은 어렸지만 왕실 중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이었다. 천재 세종대왕 피와 영재 문종 DNA로 사서삼경과 제왕학까지 두루 섭렵한 임금이었다. 나이를 뛰어넘은 영특함과 리더십 또한 곳곳에서 보였다. 현재 나이로 600여 년 전 청년을 평가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왕실은 그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아버지 문종 형제들, 할아버지 세종 형제들은 무엇을 생각하였던 걸까?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며 골몰히 생각한다.

사육신과 생육신 그리고 단종과 엄흥도, 그들은 시대를 넘어 역사 속 전설이 되었다. 단종의 삶과 죽음, 겨울 동강에 외로운 두 사람이 겹친다. 차가운 시신과 따뜻한 마음이 만나 동강에서 목숨을 건 수습이 이루어진다. ‘위선피화 오소감심’(僞善被禍 吾所甘心, 선을 위해 당하는 화는 내가 달게 받을 것이다) 엄흥도의 마지막 마음이다. 엄흥도 노모 역시 “가서 인간의 도리를 하라”며 목숨을 내주었다. 삼대를 멸한다는 서슬 퍼런 세조 명에도 엄흥도는 행하였다.
엄흥도는 노산군 시신을 노모 수의로 염한 후 선산에 암매장하였다. 아무도 모르게 태백산 넘어 영월 땅을 아들 셋과 함께 떠났다. 그가 가는 곳을 알았어도 영월 주민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생육신 김시습과 단을 만들고, 위패를 세우고 또다시 떠났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노산군이 노산대군으로 다시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노산군 묘는 영월 장릉(莊陵)으로, 위패는 종묘 영녕전에 다시 모셨다.
엄흥도 역시 영월 장릉 배식단과 창절사에 사육신·생육신과 함께 충의공으로 모셔졌다. 꽃 피는 봄날 영월 가볼까요.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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