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민연금 관치' 벗나…130조 의결권 민간에 넘긴다

민경진 2026. 3. 4. 17:4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 국내주식 의결권 민간에 넘긴다
'관치' 벗고 밸류업 기대
복지부, 5일 기금위서 첫 보고
위탁운용사에 단계적으로 이전

마켓인사이트 3월 4일 오후 4시 30분

보건복지부가 13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공단의 국내 주식 의결권을 민간 위탁운용사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민간 주주 활동을 활성화해 저평가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국민연금이 직접 행사해온 주주권이 대폭 축소되는 만큼 공단 안팎에서 우려와 반발 기류가 감지된다.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공단의 국내 주식 의결권 행사를 민간 운용사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4일 서울 충정로에 있는 국민연금 서울북부지역본부 모습. /문경덕 기자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복지부는 올해 제2차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5일 열어 국내 주식 위탁운용 구조를 기존 ‘투자 일임’에서 ‘단독 펀드’(펀드 출자) 방식으로 바꾸는 안건을 보고할 예정이다.

국민연금의 위탁 방식이 펀드 일임에서 출자로 바뀌면 포트폴리오 주식의 명의와 의결권이 국민연금에서 민간 운용사로 이전된다. 지금까지는 위탁운용사가 사들인 주식 의결권은 출자자인 국민연금에 귀속돼 대리 행사하는 구조였는데, 앞으로는 각각의 위탁운용사가 포트폴리오 기업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얘기다.

정부의 기업가치 제고 정책과 맞물려 연기금 주주권 행사 구조도 손질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통해 주주 활동을 해 왔다. 정부는 국내 증시 밸류업을 위해 주주 관여를 더 전문화·다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 같은 방안을 추진한다. 우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요소를 반영하는 ‘책임투자형 펀드’부터 시범 적용한 뒤 확대할 방침이다.

국민연금 내부에선 권한 축소 우려 등을 이유로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국민연금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를 내세워온 기조와 충돌하는 부분이 있는 만큼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주식 130兆 의결권 위탁운용사에 넘긴다
투자일임서 펀드 출자로…운용사 반대표 던질 수 있나

국내 주식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은 숫자가 말해준다. 국내 주식 보유가치만 263조원(작년 말)에 이른다.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8~9% 수준이다.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상장사만 260여 곳에 달한다. 국민연금은 의결권을 직접 행사하면서 소액주주 이익을 대변하기도 하고, 분쟁 기업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운용사에 대한 위탁 방식을 바꾼다는 건 연금 주주권을 구조적으로 손보겠다는 것이다. 투자 일임 방식이 아니라 펀드로 출자하게 되면 주주권이 연금에서 운용사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 막강한 권한 상당 부분을 민간으로 넘긴다는 의미다. 정부는 민간 주도의 적극적인 주주 활동이 밸류업(기업가치 제고)과 지배구조 개선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막강한 권한이 여러 운용사로 쪼개지는 만큼 정교한 가이드라인과 평가체계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간접 통제로 무게중심 이동

보건복지부는 5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연금의 국내 주식 위탁 운용 물량의 의결권을 민간 자산운용사에 단계적으로 넘기는 방안을 보고한다.

현행 투자 일임 구조에서는 위탁운용사의 보유 주식 명의와 의결권이 국민연금에 귀속된다. 반면 펀드 출자 방식은 국민연금이 펀드의 출자자(LP)가 되고, 위탁운용사(GP)가 펀드를 운용하면서 의결권을 직접 행사하게 된다.

상장기업에 대한 운용사 영향력이 대폭 커진다는 의미다. 정부는 국민연금 한 곳에 집중돼 있던 의사결정이 여러 전문 운용사로 확장되면서 기업별 상황에 맞춘 세밀한 주주 활동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양한 운용사가 기업과 직접 대화하며 배당 확대 및 자사주 정책 등 주주 환원 요구를 더욱 적극적으로 제기할 수 있고,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관여 활동도 확대될 것이란 설명이다.

이 같은 방향성은 세계적 흐름이라는 평가다. 일본 공적연금인 GPIF는 2014년 전후로 의결권을 외부 운용사에 전면 위임했다. 연기금이 기업 경영에 직접 개입한다는 인식을 줄이고 정부 개입 논란을 구조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신 운용사로부터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과 결과 보고를 받아 평가·면담을 통해 위탁 배분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간접 통제’를 강화해왔다.

현재 연금의 국내 주식 위탁 규모는 130조원에 이른다. 전체 국내 보유 주식의 절반 수준이다. 정부는 전면 도입보다 시범 적용을 거쳐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에 무게를 두고 있다. 우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요소를 반영한 책임투자 성격의 위탁 자산부터 적용한 뒤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일반 위탁 운용으로 범위를 넓히는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이 과정에서 운용사별 의결권 행사 원칙과 기업 관여 활동을 평가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위탁 자산을 회수·재배분할 장치를 마련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하고 있다.

◇연금 권한 축소 불가피

위탁 방식이 바뀌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전담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의 역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기금운용본부 내부에선 부정적인 의견이 적지 않다. 복지부가 지난달 24일 열린 수책위에서 해당 안건을 내놓자 수책위원과 기금운용본부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기금위에서 해당 안건이 상정되자 국민연금 안팎에서는 충분한 논의 없이 추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국내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 관행을 고려하면 정책 효과가 곧바로 나타날지에 관해 시장의 시선이 엇갈린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율은 90%를 웃돌았지만 반대 의결권 비율은 6~7% 수준에 그쳤다. 이에 비해 국민연금의 행사율은 99.6%, 반대 비율은 20.8%로 훨씬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패턴을 보였다.

더욱이 국내 주요 자산운용사는 상당수가 대형 금융그룹 계열에 속해 있어 기업·금융권 이해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다. 수수료 기반 사업자인 운용사가 합병·분할이나 경영권 분쟁 같은 민감한 안건에서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 있게 반대표를 던질 유인이 충분하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관건은 의결권 가이드라인과 이해 상충 방지 장치, 사후 평가·환수 체계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의결권이 여러 운용사로 분산되는 만큼 원칙의 일관성과 집행력을 유지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