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전 박문수 설화 간직… 목 축이고 수다 오갔던 자랑거리[자랑합니다]

시골 동네 어디든 우물 하나 없는 마을은 거의 없으리라. 우리는 우물을 ‘시암’이라고 불렀다. 시암은 옹달샘의 샘, 샘물의 사투리일 듯. 동네 이름이 찰 냉(冷) 샘 천(泉), 냉천인 것은 동네 한편에 ‘찬 시암’이 있었기 때문. 어릴 적에도 나는 동네 이름이 좋았다.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등목할 정도로 따스웠다. 촌로들로부터 대대로 전해 오는 동네 이름의 유래에 따르면 암행어사 박문수가 지나가다 물을 마신 후 동네 이름이 없다 하자 ‘냉천’으로 지어 줬다던가. 나는 그것이 사실일 거라고 믿는다.
구글 인공지능(AI) 제미나이에 어사 박문수(1691∼1756)가 호남, 특히 임실을 지나간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빛의 속도’로 답이 왔다. “임실에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한 기록과 관련 설화가 전해집니다. 오수 지역을 지날 때 가난한 선비의 억울한 송사를 해결해 줬다는 얘기도 구전됩니다. 또한 가짜 지관의 사기 행각을 밝혀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런 해결사 이미지가 더해져 임실 백성들에게는 어사 박문수가 ‘희망을 주는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오수는 의견설화로도 유명한데, 어사는 이처럼 충성과 의리가 있는 고장의 풍습을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또한 인근 성수면에는 암행 중에 쉬어 갔다는 고개와 정자 이야기가 많아 ‘어사 박문수의 길’도 있습니다.”
나는 입소문이 홍보의 ‘으뜸’이라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다. 천 년 전에 세워졌다고 구전돼 온 오수의견비가 몇 년 전 금석문학자의 탁본으로 건립 연대가 1000년 전이라는 게 밝혀졌듯이 말이다.
귀향 직후 무주의 호롱불마을로 견학을 갔을 때 우리 마을 이름을 한글 이름으로 바꾸고, 피폐한 우물을 복원하여 마을 상징으로 삼아 ‘어사 박문수가 칭찬한 물’이라고 널리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탈농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주민이 줄어들자 그 좋던 우물이 버려진 것처럼 방치됐었다. 이후 나는 ‘찬샘통신’이라는 문패로 1000편이 넘는 생활 글들을 취미로 써 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찬샘별곡’이라는 이름으로 독서 에세이도 펴냈으니, 고향 마을을 널리 알린 셈이다.
아무튼 서울시에서 정년퇴직한 후 귀향한 이장이 우물에 필이 꽂혔다. 군청은 우물을 복원해 달라는 마을 민원에 사진과 같이 1차로 아담하게 복원해 주었다. 예산이 더 확보되면 주위에 예쁜 담을 두르고, 어사 일화를 안내판으로 세울 생각이란다. 할머니들이 그동안 쓰지 않았던 우물물로 빨래도 할 것이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어쩌고 하는 노랫말도 있었지만, 방치된 우물을 볼 때마다 씁쓸하고 속이 상했다. 아줌마들은 밤에 몰래 멱(목욕)도 감았다. 그동안 몇 세대를 걸쳐 무수한 엄마들이 여기에서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었을까. 어느 집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어느 새댁이 배가 불러 언제 산달이고, 어느 집 할머니는 혼불이 나간 후 오늘내일한다더라, 혹은 누구누구가 상피를 붙었다더라 등의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나는 시암(우물)을 영어로 ‘spring’이라 하는 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암에는 물이 끊임없이 퐁퐁퐁 솟아나기도 하지만, 동네에서 일어나는 온갖 이야깃거리가 용수철처럼 통통통 튀어나와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spring은 또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기도 하다. 주민들이 동의한다면 마을 행정명을 ‘찬샘’으로 바꾸고, 몇 명 안 되는 주민들이지만 한마음으로 이 좋은 식수원을 활용하여 장류나 막걸리 제조 등 사업을 벌여 부자 마을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네를 널리 알리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마을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우물을 소재로 한 시 한 편을 감상하고 싶다. 어느 시인이 따뜻한 시선으로 우물의 나눔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우물은 깊을수록 맑은 물이 솟고/퍼낼수록 새 물이 고입니다/마을 사람들 모두가 길어다 먹어도/줄지 않는 우물물/나도 누군가에게/그런 우물이 되고 싶습니다/퍼내면 퍼낼수록 맑은 사랑 고여서/목마른 사람들의 목을 축여 주는/깊고 깊은 우물이 되고 싶습니다’
최영록(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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