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전쟁 같은 일상에 설계된 여유, 뉴욕 '미드타운 6번가'
고밀도시 뉴욕 미드타운 6번가
소규모 플라자 '머무름의 여유'

지난 기고에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따라 미드타운의 상부를 읽었다면 이번에는 그 아래, 뉴욕 직장인의 삶이 진하게 드러나는 가로 레벨을 들여다본다. 미드타운 6번가, 특히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록펠러센터 서측을 지나 54가 전후까지는 그들의 하루가 가장 압축되는 곳이다. 로펌·회계법인·컨설팅과 대기업이 밀집해 있어 출퇴근과 점심시간의 군중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경적 소리를 가르며 신호등이 바뀌기도 전에 걸음이 먼저 튀어나가는 풍경은 이 거리의 치열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전쟁 같은 일상은 영화 '어느 멋진 날(One Fine Day, 1996)'에서 엿볼 수 있다. 미셸 파이퍼가 연기한 멜라니는 록펠러 플라자에서 일하는 건축가로, 아들의 등원과 업무가 한꺼번에 겹치는 하루를 보낸다. 정장과 하이힐, 거대한 가방을 들고 올이 나간 스타킹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아들의 손을 이끌고 군중을 헤치며 다음 장소로 내달린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숨 가쁜 이동을 밀어붙이는 공간적 문법이 미드타운 6번가에서 완전히 다르게 바뀐다. 촘촘한 블록과 연속된 건축선이 만든 좁은 가로와 달리, 이곳에서는 고층 건물이 한 발 물러서며 작은 플라자와 분수가 자리 잡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즐길 수 있는 머무름의 공간이 삽입된다. 고밀 도시에서 뉴요커에게 일상의 여유를 허락하는 것은 거대한 센트럴 파크만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 더 가까운 소규모 플라자들이며, 그 대표적인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이 전환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변화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에서 선명해진다. 인수 이후 지면판 마지막 호를 준비하는 라이프 매거진에서 네거티브 필름 관리자로 일해 온 월터는 반복되는 일상에 머물며 상상만 키워온 몽상가다. 그러다 사진작가 션이 '라이프의 정수(Quintessence of Life)'라 적어 보낸 마지막 호의 표지 필름, 사라진 25번 네거티브를 찾기 위해 마침내 현실의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내 되짚는 정수는 모험 속 거친 바다와 아이슬란드의 화산, 히말라야의 고산이 아니라 잡지를 떠받쳐온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결국 결말에서 마지막 호의 표지는 회사 앞 플라자 분수 가장자리에 앉아 네거티브를 들여다보던 월터 자신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즉, 도심의 치열함을 잠시 비켜서게 하는 가로 레벨의 장치가 삶의 정수가 드러날 공간을 만들어낸다.
주목할 점은, 이런 공간이 우연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결과라는 사실이다. 1961년 조닝 이후 뉴욕시는 개발자가 가로 레벨에서 공개공간을 제공할 경우 상부에 용적률 보너스를 부여해 왔는데, 흔히 '1 to 10 보너스'로 불리는 이 교환이 그 핵심 장치다. 다시 말해 개발권과 공공공간을 맞바꾸는 거래가 도시의 공간 문법을 변화시킨 셈이다. 이러한 공공공간은 법적으로는 사유지지만, 공개성을 조건으로 가시성·접근성·연속성·체류 요소 등의 성능으로 관리된다. 플라자의 수공간이 내는 물소리는 도심 소음을 완충하고, 더운 날에는 주변 미기후를 낮춰 이곳을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으로 만든다. 나아가 6번가와 7번가 사이의 6½번가처럼 개별 건물의 공개 통로가 이어지며 블록 내부에 새로운 보행축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공공성은 플라자 한 점에 머무르지 않고, 연속된 보행 네트워크로 증식되어 가로를 풍성하게 만드는 인프라로 확장된다.
맨해튼의 고밀이 만들어내는 정수는 건물의 높이가 아니라 가로 레벨에 삽입된 작은 공간들이 선사하는 일상적 경험에 있다. 전쟁터 같은 보도 위에서도 뉴요커가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은 도시가 마련한 머무름의 여유에서 나온다. 이 일대를 찾는다면 6번가와 53가 모퉁이의 길거리 명물 할랄 가이즈(The Halal Guys)에서 플래터 한 그릇을 사 들고 영화 속 마지막 호 표지의 배경이 된 6번가 타임-라이프 빌딩의 분수 플라자 턱에 잠깐 앉아 '또 하나의 월터'가 되어보길 권한다. 이우형 남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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