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 없는 시골의 비극, 찻길 걷다 ‘황천길’
<8> 산간·농어촌 지역의 아픔

3일 오후 전북 A시의 한 마을 어귀 왕복 2차선 도로. 키가 10m가 넘는 허연 이팝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매년 가을 이팝나무 사이로 보랏빛 코스모스가 만발해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이 길을 ‘황천길’이라고 부른다. 공원이나 산책로가 따로 없는 마을 주민들이 이른 저녁을 먹고 이곳을 걷다가 교통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 6시 해가 지자 가로등 하나 없는 이 도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양쪽으로 대형 트럭이 시속 60㎞가 넘는 속도로 쌩쌩 달렸다. 도로 양옆 흰색 실선이 그려진 갓길로 오가는 주민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실선 안쪽은 폭이 1m도 되지 않아 차가 지날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 어멈도 저기서 죽었지. ○○도 이 자리에서 죽고…. 10년 동안 네다섯 명이 저 길에서 가버렸어.” 주민 박순자(68)씨는 어둠 속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여기는 산도 없고 온통 남의 논밭이라 산책하고 싶어도 걸을 곳이 따로 없다”고 했다.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윤영호 단장)이 전국 기초자치단체 252곳 1만명을 조사한 ‘한국 건강 지수’에서 A시 같은 내륙 산간 지역이나 농어촌 지역의 건강 지수는 중하위권이었다. 정주(定住) 여건이 잘 갖춰진 대도시 지역이 상위권을 차지한 것과 대조적이다. 산업 기반 약화와 고령화에 따른 인구 구조 변화와 함께 산책로·운동 공간 부족, 의료 접근성 저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과 조선일보는 A시와 같은 전국 기초자치단체의 건강 정책을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건강 컨설팅 프로젝트(대한민국을 건강하게)’를 시작한다. 윤영호 단장을 포함한 컨설팅 전문가 패널들과 본지 취재팀은 54개 평가 항목에 대해 지자체가 실시한 자체 평가를 참고해 현장 조사에 나서 개선책을 마련할 예정이다.
◇“여기가 우리 마을 산책로” 농촌 어르신 ‘아찔한 산보’
“의사가 노동은 운동이 아니라고 하던디, 한번 돌아다녀 보셔. 운동할 곳이 어디 있나.”
전북 A시 주민 김금자(75)씨는 “마을에 변변찮은 공원도 하나 없다”며 “체육 시설을 이용하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농사짓는 사람이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그는 “도의원에게 운동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보건소 앞에다가 기구 한두 개 딸랑 갖다 놨다”며 “아프면 약 달라고 시내에 있는 병원 가는 게 전부여”라고 했다.
이 마을회관 뒤뜰엔 어깨·허리 등을 풀 수 있는 간이 운동 기구 세 개가 있었다. 당뇨·고혈압을 앓고 있는 조동수(80)씨는 매일 아침 이곳을 찾는다. 조씨는 “갈 곳이 없으니 다들 모여 이거(기구 운동)라도 하는데 얼마 전 그나마 있던 철봉이 사라졌다”고 했다. 박순자(70)씨는 “(주민들 중) 당뇨·고지혈증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고, 심장 안 좋은 사람도 많아 매일 약 먹기 바쁘다”며 “건강 관리를 하려 해도 운동할 여건이 안 된다”고 했다.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이 전국 기초자치단체 252곳 1만명을 조사한 ‘한국 건강 지수’에 따르면 지역별 운동 격차는 뚜렷했다. 중강도 이상 운동 실천율은 전북 A시가 16.8%로 경기 과천(35.1%)이나 서울 강남(30.3%)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런 격차는 신체 활동 환경과 의료 인프라 차이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라고 사업단은 분석한다.
이런 격차는 주민 질병 격차로도 이어진다. A시의 고혈압 진단 경험률은 25.3%로 경기 과천(14.4%)의 배에 가까웠다. 당뇨 진단 경험률도 A시는 12.1%로, 건강 수준이 최상위권인 강남구(6.7%)나 경기 과천시(6.2%)보다 두 배가량 높았다.
본지가 찾은 이 마을은 땅이 평평하고 넓어 산책하기 좋아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논밭 사이 통로는 한 명이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논밭 주위에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조성돼 있지만 차량이 쌩쌩 달렸다. 주민들이 농사일을 마치고 산보하며 건강을 관리할 공간이 마땅찮았다.
당뇨·고혈압·고지혈증 등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주민들은 경로당·보건소가 운영하는 운동 프로그램 날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마저도 반년에 한 번씩 다른 지역 경로당 강사가 찾아와 이 마을 노인들에게 간단한 운동 동작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지난달 23일 오후 찾은 인근 경로당에선 노인 세 명이 방바닥에 몸을 뉜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노인은 “보건소 선생님이 와서 발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을 가르쳐 줬었는데”라며 “심심하고 할 게 없어 선생님이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이 마을 보건소는 인근 5개 마을에 사는 주민 400여명의 유일한 진료 시설이다. “어머니, 진통제 주사가 동이 났어요.” 김장을 하고 몸살이 났다며 보건소를 찾은 김순례(83)씨는 보건소 직원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근이완제와 진통소염제가 담긴 약봉지를 대신 받아 들고는 “아침부터 자전거 타고 2㎞ 넘게 왔는디 속상하지. 약 안 들으면 시내 병원에 가야지 별수 있나”라고 했다. 김씨는 몇 달 전에도 디스크가 터져 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A시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2.3명에 불과하다. 서울 강남구(1000명당 12.8명)의 약 18% 수준이다.
인근 전북 B군도 의료 접근성이 낮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산지와 좁은 골짜기를 따라 형성돼 군의 응급의료기관까지도 차로 50분 이상 걸린다. 직행버스는 없다.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근 도시의 공공 병원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단 세 차례만 오간다.
B군의 한 산간 마을에 사는 이광수(71)씨는 작년 여름 장마철 뇌출혈로 쓰러졌다. 함께 있던 이웃이 바로 신고했지만 산길과 빗길을 지나 응급실에 도착하기까지는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내 강기남(78)씨는 “골든타임이 4시간이라던데 응급실에 겨우 맞춰 간 것”이라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이씨는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됐지만, 생계를 위해 여전히 인근 도시로 일을 다닌다. 강씨는 “아프고 나니까 (시골에서 사는 게) 후회가 되더라”고 했다.
B군의 한 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주민들은 체념 상태였다. 김덕자(74)씨는 “여기는 의사가 없으니, 보건소 가서 약이나 받고 때운다”고 했다. 박명수(71)씨는 “구급차 불러서 안 쉬고 가도 45분은 걸린다”며 “갑자기 쓰러지면 (병원에 제때 가지 못해)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뭐”라고 했다.
윤영호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장은 “지역 산업 기반 회복과 함께 생활 밀착형 의료·복지 인프라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며 “노령화와 산업 붕괴가 겹친 농촌에서는 주민 건강과 안전 확보가 지역 사회 존폐와 직결된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日 유조선, 또 호르무즈 통과… 한국 선박 26척은?
- [속보] “이란, 생필품 실은 이란행 배는 호르무즈 통과 허용”
- KLPGA 국내 개막전서 하루에 홀인원 3개 나와... KLPGA 투어 최다 타이
- 현대캐피탈, 5세트 막판 “레오 서브 아웃” 비디오 판독에 불복... 연맹에 공식 이의제기
- 尹 탄핵 1년… 서울 도심 곳곳 대규모 집회 열려
- 美 정보당국 “이란, 당분간 호르무즈 해협 봉쇄 안 풀 듯”
- 제주 4·3 사건의 시작? 3·1 발포 사건의 진실 [호준석의 역사전쟁]
- 10만달러 아시아쿼터 대만 투수가 에이스? 왕옌청 호투 한화, 두산 잡고 2연승
- 정청래 “내란 청산 10년 걸릴 수도... 국힘, 지선 후보 내지 말아야”
- 대한항공, 챔프 2차전도 잡았다! 현대캐피탈 꺾고 통합우승까지 단 1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