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북남’… 민족 인식 사실상 폐기

장민주 2026. 3. 3.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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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8·9차 당대회 전문 교차분석
‘남조선’ 지칭 대신에 ‘한국’으로 써
하노이 노딜 후 ‘적대적 두 국가’ 전환
‘동족’ 지우고 ‘국경’ 세워… 핵 명분 쌓고 내부 불만 잠재우기
8차 땐 북남 16회·남조선 9회 사용
9차 땐 통일 대상 아닌 ‘타국’ 명칭
교류·협력 내세운 정부에 적개심
민족·화해 등 단어도 현저히 줄어
적대 타깃, 美중심에서 남한 이동
대화 통한 관계 개선의지는 희박
美엔 ‘조건부 대화문’ 여지 남겨
당분간 새 돌파구 찾기 어려울 듯

지난달 19∼25일 진행된 9차 북한 노동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한을 향해 내놓은 언사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동족 범주에서 한국을 영원히 배제할 것”, “가장 적대적인 실체”라며 짙은 적개심을 드러냈고, 교류·협력에 방점을 둔 이재명정부의 대북정책은 “서투른 기만극, 졸작”으로 규정했다. 평화, 화해를 위한 표현은 삭제됐다. 북한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당대회의 이런 결과는 ‘적대적 두 국가론’의 고착으로 평가해도 무방하다. 실질이야 어쨌든 원칙적으로는 통일의 대상, 같은 민족으로 봤던 남한을 대립하는 별개의 국가로 보는 북한의 인식 변화 기점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으로 꼽힌다. 남한을 지렛대로 한 제재 완화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대화 대상에서 군사적 관리 대상으로 전환했고, 심각한 경제난에 따른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적으로 삼았다.

이런 변화를 담아 적대적 두 국가론의 ‘빌드업’을 시작한 게 하노이 노딜 2년 후인 2021년 8차 당대회다. 5년 후인 올해 9차 당대회에서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김 위원장이 발표한 8차, 9차 당대회 사업총화보고 전문(총 1만1848단어)을 남북관계를 규정한 핵심단어 중심으로 세계일보가 교차 분석한 결과에 이런 변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남북한을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사용하던 ‘북남’, ‘남조선’ 등의 표현이 사라졌고, ‘통일’, ‘화해’와 같은 단어의 사용이 현저히 줄었다.

지난 2월 25일 북한의 최대 정치 이벤트인 9차 조선노동당대회를 마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요 간부들과 함께 평양 4·25문화회관을 나서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남조선’ 사라지고, ‘한국’ 등장

북한은 분단 이후 수십년간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 문제’로 규정했다. 일상적으로 헐뜯고, 그것이 때로 심각한 충돌로 이어져도 남한은 같은 뿌리를 가진 동족이었다. 하지만 9차에서 민족이라는 단어 사용이 급감하면서 남북관계가 민족 문제라는 인식도 사실상 폐기된 것으로 파악된다. 8차에서 북한은 남북의 특수관계를 강조하면서 ‘북남’을 16회, ‘남조선’을 9회 사용했다. ‘남조선’은 스스로를 ‘북조선’으로 부르는 것에 대응해 공식 문건, 선전매체에서 남한을 지칭할 때 사용해 온 표현이다. ‘북남’, ‘남조선’에는 남한을 별도의 국가가 아닌 통일 대상 지역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으나 9차에서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타국을 지칭할 때 쓰는 외교 명칭이 등장했다. 8차에 없던 ‘한국’을 21회, 남한의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를 2회 사용했다. 국가 대 국가 관계임을 전제로 한 ‘조한관계(4회)’도 눈에 띈다. 대남 노선을 적대국 관계로 전환했다는 사실이 국가 대 국가 표현을 통해 문서상 공식화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적대적 두 국가론이 헌법에 반영돼 마침표를 찍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2024년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적대적 두 국가론을 헌법화하겠다고 얘기한 후, 관련 용어·기구·상징 등을 모두 제거하면서 세밀하고 치밀하게 이행해왔다”며 “다만 헌법에 두 국가 노선이 완전히 반영됐는지는 아직 불확실하다”고 분석했다. 올해 열릴 최고인민회의에서 관련 조항이 명문화될지 여부가 중요한 지점이다.

◆통일, “민족의 숙원”→“절대 불가능”

한반도 정세 안정의 의지를 담아냈던 단어의 사용이 현격하게 줄어든 것도 확인됐다. 8차에서 ‘민족’(8회), ‘통일’(13회), ‘화해’(3회)가 총 24번 사용됐다. 하지만 9차에서는 각각 1회, 1회, 4회에 불과했다.

단어가 쓰인 문장의 맥락도 긍정에서 부정으로 변했다. 8차에서는 ‘조국통일의 위업’, ‘민족의 숙원’ 등 긍정의 의미를 담았다. 북한의 대남정책 지향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9차에서는 “같은《민족》이라는 타성에 포로되여”, “애초에 역대 한국 집권세력들은 우리와의 진정한 화해와 단합을 바라지 않았으며”, “(남한은) 음흉하게도 화해와 협력의 기회를 통해…우리 체제의 붕괴를 기도해 왔다”, “절대 불가능한 화해와 《통일》”, “기만적인 《화해》” 등 부정적 의미가 뚜렷하다. 이 단어들을 사용할 때 겹화살괄호(《》)를 쓴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북한에서는 특정 개념을 비판하거나 거리를 두려 할 때 겹화살괄호로 묶는다. ‘소위’, ‘이른바’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양 석좌교수는 “북한이 민족, 통일, 화해 등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라면서도 “북한이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를 완전히 폐기한 것은 아니다. 과거 한민족 동포 개념과는 다른 체제 중심의 의미로 전환되고 있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적대’의 타깃, 미국→남한

8차까지만 해도 북한의 주된 ‘적대’의 대상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이었다. 남한을 겨냥한 적대감 표현이 없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같은 양상이 역전된 것도 8차, 9차의 뚜렷한 차이다.

8차에서 ‘적대’는 14회 쓰였다. 이 중 11회가 미국 중심의 외국을 겨냥했다. “미국과 적대세력들이 감행한 최악의 야만적인 제재봉쇄책동의 후과”,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 “새로운 조미관계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철회하는 데 있다” 등의 문장이 등장한다. 남한과 관련된 표현은 “남조선에서는 의연히 조선반도 정세를 격화시키는 군사적 적대행위”, “북남관계에서…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를 일체 중지하며”라는 2회가 전부였다. 나머지 1회는 북한의 ‘자주적대’ 기조를 보여주는 중립적 표현이었다.

지난 2월 25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노동당 제9차대회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2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9차에서는 12회 사용됐고 미국 중심의 외국, 남한이 절반씩 차지했다. 남한을 향한 적개심을 과거보다 빈번하게 드러낸 것이다.

‘적대’의 성격에도 차이를 보였다. 미국 관련 문장에서는 ‘적대시정책(3회)’을 주로 언급하면서,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철회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리유가 없다”며 조건부 관계 개선 여지를 열어뒀다. 반면 남한에 대해서는 “가장 적대적”, “변할 수 없는 적대적 실체”, “제1의 적대국”, “철저한 적대국” 등으로 대화, 화해의 여지를 없앴다. 남한이 유화적인 태도로 북한에 접근하더라도 관계 개선은 어려울 것이라고 선을 그은 셈이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번 당대회에서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에 여지를 두지 않았다는 의지를 단호하게 보였다”며 “당분간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짚었다.

장민주 기자 chapt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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