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넌 용기, 섬의 3·1운동] ③ 용유도편-대양을 넘어 동포에 닿다

안지섭 기자 2026. 3. 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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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8일 관청리서 150여 명 참여
혈성단 결성…격문 80여 통 배포, 조직적 거사
9월 18일 ‘신한민보’ 보도…미주 한인사회에 소식
일부 지사 미서훈 논란…재평가 요구 제기
▲ 용유도 청년들이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림은 AI 이미지 생성기 '나노바나나(Nano Banana)'에 넣어 제작했다. /양민섭 PD sub@incheonilbo.com

"용유도의 함성은 우리나라를 넘어 외국에 사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가져다 줬을 겁니다."

1919년 3월 28일 인천 육지에서 30㎞ 떨어진 용유도에서는 젊은 청년 10여 명이 섬 주민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펼쳤다.

주동자들은 곧바로 경찰에 체포됐으나 그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 미주 한인사회에도 전파돼 많은 동포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용유 독립운동가 중 일부는 서훈을 받지 못했다.

영종도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김명신 중구향토문화회장은 "작은 섬마을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제에 항거한 사건"이라며 "훗날 미국과 멕시코 등 해외로 이주한 지역 출신 지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결의, 섬으로 돌아오다

1919년 3월, 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18세 청년 조명원은 3·1운동을 목격하며 그 장면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러고는 자기 고향 인천 용유도에서도 독립 의지를 전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용유도는 현재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섬인 영종도 서남부이지만, 매립되기 전에는 독립된 섬이었다.

"우리는 대한의 이름을 부르짖을 '혈성단'이다."

▲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이 인천 중구 조병수 가옥에서 혈성단을 조직하고 결의를 하는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다. AI 이미지 생성기 '나노바나나(Nano Banana)'에 넣어 제작했다. 네 청년들이 태극기에 피 '혈(血)과 정성 '성(誠)자를 그리며 결의에 찬 모습을 강조하고자 했다. /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조명원은 1919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또래 청년들과 모임을 갖고 혈성단을 조직했다. 혈성단에는 같은 마을에 사는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 3명도 뜻을 같이했다. 조직 이름에 피 '혈(血)'과 정성 '성(誠)'이라는 글자가 담긴 만큼, 청년들의 의지는 결연했다.

혈성단은 거사일을 3월 28일로 정했다. 무명천 위에 큰 태극문양을 그렸고, 주변에 청년 4명의 이름을 새겼다.

또 남북리와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 등 이웃마을에 격문 80여 통을 만들어 배포했다. 

"28일 관청리에서 만세 운동을 할 터이니 뜻있는 자는 모이라."

섬마을 청년들의 의지는 섬마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거사 당일, 관청리 광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15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조명원은 태극기 앞에 섰다. 

"대한독립만세"

그가 거사의 취지를 설명한 뒤 큰 목소리로 외치자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화답했다. 혈성단뿐만 아니라 이난의, 윤치방, 김윤배, 윤보신, 유웅렬, 오기섭, 구길서 등 7명의 청년들은 앞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당시 영종도가 일제로부터 어떤 핍박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김명신 회장은 "과거 이곳에 유배 온 용유도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자주 의식이 투철했던 분들이 많아 청년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며 "1910년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수탈이 계속되자 생활이 악화된 것도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사진은 인천 중구 남북동에 있는 조병수 가옥의 모습. 조병수 가옥은 용유도의 독립지사들이 만세 운동을 계획한 장소다. /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태평양을 건넌 용유도의 함성

이 사건으로 시위를 주동했던 11명의 지사는 모두 경찰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조명원은 징역 1년 6개월, 이난의는 1년 8개월이 선고됐고, 혈성단 동지인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도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만세 운동 당시 군중을 이끈 6명은 태형 90대를 받았다. 삼촌 윤치방은 조카 윤보신의 형벌까지 대신 감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 180대를 맞아 장애를 갖게 됐다고 한다.

조종서는 상고장에서 "조선인이 만세를 부른 건 당연한 일"이라며 "이를 범죄로 처벌하는 건 부당하다"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용유도의 만세운동은 섬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거사가 있은 지 6개월 뒤인 9월 1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에서는 용유도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가 실린다.

신한민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가 1902년 창간한 신문으로,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역할을 맡았던 매체였다.

당시 신한민보는 3면 4단의 '조종문 씨 본댁 소식'에 "조종문 씨는 근일 본국통신을 받았는데 본국에 있는 조종서, 조카 수동과 곁집에 사는 김문언, 김봉학 네 청년은 모두 18세 된 학생들인데 3월 1일 이후로 경기도 용유도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원수의 손에 의해 잡혀 모두 1년 징역선고를 받고 징역 중에 무한한 고난을 당했더라"고 적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조카 수동은 조명원, 김문언과 김봉학은 각각 문무현과 최봉학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모두 혈성단 단원들이다.

인천에서 성장한 독립운동가 조종문은 대한인국민회 임원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조직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작은 섬에서 시작된 함성이 태평양을 건너 독립운동의 불씨를 전달한 것이다.

▲ 인천 중구 용유 3·1독립만세기념비 앞에서 김영신 인천 중구 향토문화보존회장이 용유 3·28만세 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남겨진 과제

용유도 청년 11명 중 일부는 공훈을 인정받지 못했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조명원과 윤치방, 오기섭 등 3명을 제외한 나머지 8명에 1990년부터 2024년까지 애족장과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

특히 조명원은 섬에서 혈성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아무런 수훈이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사자료'에도 그가 혈성단을 조직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한 사실이 명확히 기록돼 있다.

김명신 회장은 "서훈 심사 기준의 형평성과 일관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독립운동의 역사적 완성을 위해 반드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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