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크루즈가 띄우고 제니도 반했다 군용 선글라스의 ‘스마트한 반전’ [언박싱 프로-레이밴]
맥아더·톰 크루즈·마이클 잭슨의 ‘계보’
암흑기 지나 에실로룩소티카에서 전성기
아이웨어 넘어 세대 아우르는 브랜드 진화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트렌드 속에서 누군가는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릅니다. 소비자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일순간에 외면받기 일쑤입니다. ‘메가 브랜드’를 향해 고군분투하는 유통가의 속사정, ‘언박싱 프로’를 통해 들려드립니다.
블랙핑크 제니는 그 자체로 하나의 트렌드라 불릴 만큼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아이콘 중 한 명이다. 오랫동안 국내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모델로 활동하며 브랜드를 대표했다. 제니가 착용한 선글라스는 곧바로 화제가 되며 품절 대란을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제니와 젠틀몬스터의 결별 소식이 알려졌다. ‘젠틀몬스터=제니’라는 공식이 깨졌다. 업계는 물론 전 세계 팬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글로벌 아이웨어 브랜드 ‘레이밴’의 관계자들이 제니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팔로우한 소식이 알려지며 궁금증을 더했다.
지난해 레이밴은 서울 성수동에서 국내 첫 팝업을 열었다. 제니는 포토콜에 단독 참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제니의 등장으로 트렌디함이 더해진 레이밴. 사실은 기성세대에는 ‘라이방’, ‘레이방’이라는 이름으로도 익숙할 만큼 오래된 브랜드다.
![레이밴의 첫 번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에이셉 라키. [레이밴 인스타그램]](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03/ned/20260303114107755bqzx.jpg)
조종사를 위해 개발된 선글라스로 시작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 초. 당시 항공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조종사들은 새로운 항로 개척에 나섰다. 조종사들은 높은 고도에서 장거리로 비행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고공비행 중 태양 빛과 반사광 때문에 시야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고산병을 앓기도 했다. 특히 장시간의 비행에서 오는 눈의 피로와 두통은 조종사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미 육군 항공대는 광학 전문기업 바슈&롬에 특수 안경 제작을 의뢰했다. 1936년 바슈&롬은 N-15렌즈를 개발한다. 강한 빛을 차단하면서도 조종사가 계기판이나 주변 지형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한 특수 렌즈였다. 진한 녹색 크리스털 렌즈로, 태양의 강렬한 광선을 흡수하면서도 색 왜곡을 최소화해 시야가 선명하게 유지되게 했다.
첫 모델은 지금도 레이밴을 상징하는 에비에이터 스타일이다. 큰 물방울 모양 렌즈는 비행 시 조종사의 시야를 최대한 넓게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다. 얇은 금속 프레임은 테의 무게를 줄여 착용감을 개선했다. 얼굴을 감싸는 듯한 곡선형 디자인은 햇빛이 옆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 줬다. 단순한 멋이 아니라 철저히 실용성과 기능성에서 출발한 디자인이었다.
최초의 ‘조종사용 선글라스’는 1937년 정식으로 민간 시장에 출시되며 레이밴이라는 브랜드명이 붙었다. 브랜드 이름의 출발점도 렌즈의 기능 그대로 ‘Ray(빛, 광선)’와 ‘Ban(차단하다)’이라는 뜻을 담았다. 레이밴 선글라스는 곧 미국 사회 전반에 퍼지며 군인뿐만 아니라 스포츠 선수, 모험가들까지 착용하기 시작했다. 조종사의 멋진 모습을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수용으로 시작한 레이밴은 패션에서도 성장 가능성을 엿보게 된 것이다.
대중에게 레이밴을 각인시킨 최초의 인물은 맥아더 장군이라는 의견이 뒤따른다. 맥아더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국민적 영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을 이끌고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44년 필리핀 전투에서 맥아더 장군이 레이밴 에비게이터를 착용했고, 그 모습은 대중에게 전달되며 엄청난 유행으로 번졌다.
![영화 ‘탑건’의 주인공 톰 크루즈가 착용한 레이밴. [네이버 영화 스틸컷]](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03/ned/20260303114107992npwo.png)
문화의 아이콘이 착용…대중화된 ‘레이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할리우드는 사람들의 옷차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전쟁 후 미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초강대국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문화 산업 역시 세계로 뻗어나갔는데, 그 중심에 할리우드 영화가 있었다.
미국의 풍요로운 생활, 자유민주주의 가치, 소비문화는 대중 매체를 통해 세계 곳곳에 전파됐다.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오드리 헵번 같은 글로벌 스타를 배출하며 대중 문화의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의상, 헤어스타일, 태도는 세계 젊은이들의 ‘트렌드 교과서’로 자리 잡았다. 패션·뷰티·라이프스타일 산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여러 할리우드 스타들은 레이밴의 제품을 스크린 속에서 착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배우 톰 크루즈다. 1986년 개봉한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가 전투기 조종사 ‘매버릭’으로 등장하는 첫 장면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햇빛이 쏟아지는 비행장 위, 청바지에 가죽 재킷, 자신감 넘치는 미소, 얼굴을 완전히 가린 듯한 대형 선글라스가 어우러졌다.
이때 톰 크루즈가 착용한 것이 바로 레이밴의 대표 모델 ‘에비에이터’였다. 사실 톰 크루즈가 착용한 선글라스는 처음 레이밴을 대중에게 알린 맥아더 장군이 쓰던 모델이었다. 단순한 군용 아이웨어였던 에비에이터는 톰 크루즈를 통해 또다시 세계적인 스타일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태양 빛을 완벽히 차단하는 기능성과 조종사의 강인함, 자유분방한 젊음이 겹치며 레이밴은 곧 ‘쿨함(cool)’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도 뜨거웠다. 톰 크루즈가 착용한 에비에이터 선글라스의 판매량은 영화 개봉 후 판매량이 40% 증가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레이밴은 폭발적인 인기에 수백만개의 에비에이터 모델을 만들었다. 실제로 80년대 후반에는 탑건 덕분에 10대부터 월스트리트 은행가까지 많은 이들이 에비에이터를 착용했다.
![1984년 그래미 어워즈 마이클 잭슨. [X 캡쳐]](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03/ned/20260303114108214krcb.png)
배우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가수도 레이밴을 착용했다.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부터 무대에 설 때 레이밴 에비에이터 선글라스를 자주 착용했다. 단순한 패션을 넘어 무대 연출의 일부이기도 했다. 특히 1984년 그래미 어워즈에서 마이클 잭슨은 레이밴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무대에 올라 8관왕을 휩쓸었다. 이 장면은 전 세계적으로 방송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선글라스는 마이클 잭슨의 스타 이미지를 더욱 신비롭고 카리스마 있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됐다. 그의 팬들은 선글라스를 단순한 패션 아이템이 아니라 마이클 잭슨을 따라 하기 위한 필수 아이템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레이밴이 대중음악 팬층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계기 중 하나다.

치열해진 선글라스 시장 경쟁에 찾아온 위기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레이밴은 위기를 맞이한다. 수많은 패션 브랜드와 스포츠 브랜드가 선글라스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1990년대 들어 패션 트렌드가 바뀌면서 레이밴의 클래식한 디자인은 구식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얇고 가벼운 프레임이 유행하면서 묵직한 레이밴의 에비에이터, 웨이페어러 같은 제품은 젊은 세대에게 매력이 떨어졌다. 실제로 이 시기 레이밴의 미국 내 판매량은 10년간 50% 이상 급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저가 아이웨어 브랜드의 부상도 영향을 미쳤다. 대중은 더 저렴하고 트렌디한 안경을 선택하기 시작했고, 레이밴은 ‘비싸지만 올드한 브랜드’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안게 됐다.
당시 레이밴의 모기업 바슈&롬은 레이밴을 전략적으로 키우는 데 소홀하기도 했다. 광고나 협찬 같은 마케팅 활동도 부족해졌고, 결과적으로 레이밴은 대중 문화 속 존재감을 잃게 됐다. 매출이 급락하면서 1990년대 중반, 바슈&롬은 결국 브랜드 매각을 결정했다. 1999년 룩소티카 그룹은 바슈롬의 안경테 사업을 인수했다. 매각가는 약 6억4000만 달러였다. 당시 환율을 적용하면 한화 약 7300억원 수준이다.
룩소티카는 유통망과 마케팅을 전면 재정비해 레이밴을 글로벌 패션 아이콘으로 되살리는 데 집중했다. 디자인 리뉴얼, 색상과 소재 다변화,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젊은 세대를 다시 끌어들이는 전략이 효과를 봤다.
![레이밴 선글라스를 착용한 블랙핑크 제니. [제니 인스타그램]](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03/ned/20260303114108740ewjc.png)
스마트글라스·리브랜딩…‘제2 전성기’ 노린다
현재 레이밴을 전개하는 곳은 ‘에실로룩소티카’다. 2017년, 세계 최대 안경 제조업체 이탈리아의 룩소티카는 세계 1위 안경렌즈 업체인 프랑스 에실로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룩소티카는 레이밴을 비롯해 오클리 등 다양한 안경·선글라스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었다. 2018년 에실로룩소티카라는 이름으로 수직합병을 완료하며 지금의 형태가 됐다.
에실로룩소티카가 집중하고 있는 ‘넥스트 스텝’은 무엇일까. 이들이 점찍은 새로운 성장축은 바로 ‘스마트 글라스’ 시장이다. 스마트 안경이 스마트폰의 뒤를 이을 차세대 기기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들은 에실로룩소티카와 앞다퉈 손을 잡고 싶어한다. 제조부터 판매, 유통까지 거의 모든 아이웨어 사업을 수직계열화하고 있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모회사 메타플랫폼은 지난해 에실로룩소티카의 지분 약 3%를 인수했다.
메타는 에실로룩소티카와 손잡고 카메라와 스피커 등이 장착된 레이밴 브랜드의 스마트 안경을 2021년부터 선보여왔다. 에실로룩소티카는 관련 사업이 실적을 이끌며 매년 매출이 증가하는 추세다.
전성기 시대의 아이콘들과 함께했던 레이밴은 젊은 세대 소비자 공략에도 나서고 있다. 레이밴은 래퍼 에이셉 라키를 첫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했다. 가수 리한나의 남편으로도 알려진 에이셉 라키는 패션 트렌드 세터로 꼽히는 인물이다. 에이셉 라키는 레이밴의 디자인부터 광고, 매장 등 전반적인 리브랜딩에 나서며 힙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젠틀몬스터의 오랜 앰배서더였던 블랙핑크 제니가 레이밴과 함께 하며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레이밴은 지난해 9월 성수동에서 국내 최초 브랜드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당시 팝업 포토월에서 제니는 에이삽 라키 협업 컬렉션인 ‘웨이페어러 푸퍼’ 제품을 착용해 화제가 됐다. 팝업에서는 기존 모델을 재해석한 ‘블랙 아웃’, 신규 컬렉션 ‘뉴 제네레이션’ 등을 선보였다. 알레산드로 롱고 레이밴 브래드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는 “이번 팝업은 레이밴이 MZ세대와 새로운 문화적 접점을 만들어가는 글로벌 전략의 일환”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사실 제니의 선택이 보여주는 재밌는 포인트는 하나 더 있다. 애플은 올해 말 애플 생태계와 더 정밀하게 연동되는 스마트 안경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 역시 삼성전자와 함께 스마트 안경을 개발하고 있다. 지난해 구글은 젠틀몬스터에 1450억원을 투자해 지분 4%를 확보하겠다는 소식을 밝혔다. 제니가 떠난 젠틀몬스터도 레이밴처럼 스마트 글라스 시장 속에 들어와있는 셈이다. 과연 앞으로 승자는 누가 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미군 조종사용 선글라스로 태어난 이후 영화와 대중문화 속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던 레이밴. 한때 암흑기를 지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이어가고 있다. 단순한 아이웨어를 넘어 세대를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진화했다.
전새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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