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몽인가 반란인가, 강화에서 시작된 삼별초 항전 [강화 속 고려를 찾아서·(30)]
몽골에 항복한 王, 강화에서 삼별초 항전 시작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모이라”
외포리 망양돈대 앞에 세워진 삼별초 기념비
강화군·북제주군·진도군 공동 기념물 조성

40여 년 계속된 여몽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삼별초였다. 삼별초 항쟁은 고려 정부가 몽골에 항복하는 의미로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기로 하자 그에 반발해 일어났다. 삼별초는 몽골에 굽히지 않겠다면서 새로운 항몽 정부를 세웠는데, 그 시작점이 바로 강화도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그려진다. ‘고려사절요’는 ‘재·추(주요 신하)들이 모여 다시 옛 서울에 도읍하기를 의논하고 방(榜)을 붙이니, 삼별초가 다른 마음이 있어 좇지 않고 제 마음대로 창고를 열었다’고 기록해 삼별초 항쟁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정부가 개성으로 다시 나가기로 하고 그 내용을 백성들에게 고시하니 삼별초가 그에 따르지 않고 달리 움직였다는 얘기다.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아래로부터의 군사 쿠데타’였던 셈이다. ‘창고를 열었다’는 것은 강화에 있던 국가의 재산을 빼냈다는 것인데, 삼별초는 항전에 필요한 각종 재물과 식량, 무기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1270년 5월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와중에 고려의 임금 원종은 환도를 단행, 강화에서 개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곧이어 개성에 있던 장군 김지저를 강화로 보내 삼별초군을 무찌르게 했다. 이 과정에서 삼별초는 군인 명부, 즉 군적을 빼앗기고 말았다. 군적이 넘어갔으니 되돌릴 수도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항전을 위한 삼별초의 진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듯하다.

1270년 6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의 노영희 등이 삼별초 항전을 독려했다. 이들은 사람을 시켜 강화 도읍지를 돌아다니면서 “오랑캐 군사가 크게 이르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구정(毬庭)으로 모이라” 했다. 오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모였다. 삼별초의 리더 배중손은 곧바로 왕족인 온(溫)을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항몽의 기치를 새롭게 내건 삼별초는 강화에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 1천여 척의 배에 각종 군수물자와 가족을 싣고 강화를 떠나 전라남도 진도로 향했다. 그때 그 삼별초의 일어섬과 진도행을 기리는 기념물이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바닷가 망양돈대 앞에 세워져 있다.
외포리의 삼별초 기념 공간은 좀 독특한 형태로 조성돼 있다.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三別抄軍護國抗蒙遺墟碑)가 망양돈대 입구 쪽에 바짝 붙어 서 있고, 그 앞으로 제주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 2기와 진도를 대표하는 진돗개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곳이 삼별초를 통하여 강화도, 제주도, 진도, 3개 섬을 연결하는 특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는 1993년 강화군민들이 뜻을 모아 세웠고, 돌하르방은 2004년 북제주군에서, 진돗개상은 2005년 진도군에서 각각 마련했다. 북제주군과 진도군은 삼별초를 인연으로 하여 강화군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삼별초는 1220년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가 나라 안에 도둑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만든 야별초가 기원이다. 야별초의 숫자가 많아지자 1252년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했다. 1255년에는 몽골에 포로로 잡혀 갔다 도망 나온 이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했는데, 이 신의군에 좌·우별초를 더해 삼별초라 했다.
대몽항쟁의 주역 삼별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무신정권을 숙주로 하여 성장하고, 몽골과의 항쟁을 존재 이유로 삼았던 삼별초.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란을 꾀했을 뿐이라는 시각과 침략자 몽골에 굽히지 않는 고려 무인의 기상을 끝까지 꺾지 않았다는 평가가 동시에 존재한다. 북한 학계에서는 ‘몽골 침략자와 그 몽골 침략자에 결탁한 국내 정권에 대한 인민들의 항전’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삼별초를 보는 시각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삼별초와 관련한 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정진오 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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