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 브레이크 없는 巨與 입법독주… 野 무기력한 필리버스터

김윤정 2026. 3. 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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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사법개혁 3법부터 행정통합법까지 ‘24시간 컷’ 앞세워 패키지 강행 처리
상정 직전 땜질 수정 반복하며 정당성 논란 자초… 의회주의·숙의 절차 실종 비판
2024년부터 총 28회 남발된 국민의힘 필리버스터, 실제 법안 저지 실적은 ‘전무’
7박 8일 예고했던 이번 항전도 TK 통합법 처리 조건 걸고 5박 6일 만에 ‘백기 투항’
1964년 김대중·2016년 테러방지법 때와 달리 ‘국민 설득’ 서사 부재… 국익도 뒷전
제미나이가 그린 일러스트.


1일 국회 본회의장은 현재 대한민국 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지난달 24일부터 5박 6일 동안 이어지던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는 이날 오후 "무제한 토론을 할 의원이 없다"는 이학영 국회부의장의 선포와 함께 종료됐다. 국민의힘의 유일한 방어막이 걷히자마자 더불어민주당은 국민투표법 개정안, 전남·광주 행정통합 특별법 등 쟁점 법안 4건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물리적 충돌은 없었지만 의회민주주의의 핵심인 대화와 타협은 완벽하게 실종됐다. 거대 여당은 의석수를 앞세워 24시간마다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결시키는 '기계적 속도전'으로 쟁점 법안을 패키지로 몰아쳤다. 반면 소수 야당은 국민을 설득할 메시지와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텃밭 민원인 대구·경북(TK) 통합법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다수당의 입법 질주와 저지력도 명분도 잃어버린 소수당의 무기력한 필리버스터가 맞물리며, 국회는 치열한 토론장이 아닌 맹목적 세 과시의 무대로 전락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1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 사법개혁부터 행정통합까지… 거침없는 패키지 강행

최근 1주일간 국회 의사일정은 야당의 반대에도 법안 처리를 밀어붙이는 '패키지 처리' 양상을 보였다. 민주당은 지난달 24일 3차 상법 개정안 상정을 시작으로 이른바 '사법개혁 3법'을 릴레이로 강행 처리했다. 26일 판검사가 위법·부당한 목적으로 법을 왜곡할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법왜곡죄법(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27일에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재판소원제법(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재석 225명 중 찬성 162명으로 의결했다. 이어 28일 현행 14명인 대법관 수를 3년에 걸쳐 26명까지 늘리는 대법관 증원법(법원조직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이후 1일 밤에는 남은 4개 법안을 속전속결로 의결했다. 국민투표 투표권자를 재외투표인 명부 등재자까지 확대하는 국민투표법 개정안을 재석 176명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켰고, 인구 317만명 규모의 전남광주통합특별시를 출범시키는 특별법 역시 재석 175명 중 찬성 159명으로 가결했다. 이 외에도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아동수당법 개정안이 국민의힘이 불참한 가운데 민주당 주도로 처리됐다. 국회법상 재적 의원 5분의 3(179명) 이상 찬성 시 24시간 후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결할 수 있는 규정을 철저히 활용한 결과다.

속도전의 이면에는 심각한 정당성 훼손 논란이 남았다. 법왜곡죄의 경우 당 안팎에서 위헌 논란이 일자 본회의 상정 직전 적용 대상을 형사사건으로 한정하는 수정안을 급조했다. 국민투표법 역시 '선관위 업무 방해 목적의 허위 사실 유포 시 10년 이하 징역' 신설 조항에 대해 국회 사무처조차 "전례를 찾기 어려운 입법"이라고 지적하자 표결 직전 해당 내용을 급히 삭제했다. 민주당 출신인 우원식 국회의장이 "법제사법위원회 의결을 거쳐 부의된 법률안이 본회의에서 다시 수정되는 것은 매우 나쁜 전례"라고 질타할 만큼 쟁점 법안들이 충분한 사회적 합의나 전문가 검토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됐다.

◇ 28번 남발된 외침… 실제 저지는 '0건'

거대 여당에 맞선 국민의힘의 대응은 투쟁의 지속력과 실효성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22대 국회 개원 이후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기록을 살펴보면, 입법 저지라는 본연의 목적 대신 절차적 지연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24년부터 올 3월까지 국민의힘은 총 28건의 법안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진행했다. 2024년에 순직 해병 특검법, 방송4법, 민생회복지원금 특별법, 노조법 개정안 등 7건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벌였다. 2025년에는 정부조직법, 방송3법,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정보통신망법 등 15건에 달했고, 이번 2026년 2월 임시국회에서도 2차 종합특검법, 상법, 사법개혁 3법, 국민투표법 등 6건을 기록했다.

그러나 28차례의 필리버스터 중 여당의 법안 통과를 실질적으로 막아낸 사례는 전무하다. 모든 쟁점 안건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는 '다건 필버' 전략은 입법 저지라는 결과물 없이 빈손으로 끝났다. 24시간 뒤 다수당의 표결로 강제 종결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의미 없는 발언만 이어가는 행태가 반복되자 국민적 피로감 역시 극에 달했다. 시간때우기식 필리버스터는 국회 내부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우 의장은 지난해 12월 24일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필리버스터가 종료된 직후 "새벽 4시에 사회 교대를 하던 시점에 본회의장 의석에는 단 2명의 의원만 남아 있었다"며 "이런 비정상적인 무제한 토론은 국민이 보시기에도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한 모습이다. 이런 식의 무제한 토론은 없어져야 한다"고 질타한 바 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가 1일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명분 잃고 백기 투항… 지역 민원과 맞바꾼 결기

이러한 무기력함의 절정은 지난달 임시국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초 7~8일간의 결사항전을 예고하며 단상에 올랐으나, 가장 뼈아픈 대목은 야당 스스로 명분을 저버린 1일 오후의 기습적인 중단 선언이었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민주당이 TK 행정통합 특별법 처리를 위한 법사위 개최를 거부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현 시간부로 필리버스터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직후 본회의장에서 국민투표법 개정안 반대 토론을 하던 의원이 발언을 멈췄고, 사회를 보던 국회부의장은 "토론할 의원이 없다"며 종결을 선포했다.

'입법 폭주 저지'와 '사법 파괴 규탄'을 외치던 투쟁의 결기가 텃밭인 TK 지역 행정통합법 처리라는 민원 앞에서 맥없이 꺾여버린 순간이다. 악법을 온몸으로 막겠다며 시작한 항전이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를 챙기기 위한 조건부 거래 카드로 선회하면서 대국민 설득력은 완벽하게 증발한 셈이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의 요구 조건인 TK 통합법 법사위 개최에 즉각 응하지도 않은 채 오히려 야당의 필리버스터 철회를 틈타 남은 쟁점 법안 4건을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결과적으로 국민의힘은 법안 통과를 막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구 생존 때문에 여당에 매달리는 형국을 자초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필리버스터 관련 전시물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 1964년 김대중과 2016년 테러방지법… 사라진 '국민 설득'

국내 정치사에서 필리버스터가 소수당의 강력한 무기로 기능했던 역사적 장면들에는 단순히 시간만 태우는 것을 넘어 국민을 설득하는 '서사'가 존재했다. 1964년 4월 제6대 국회에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인사인 김준연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5시간19분 동안 단상에 섰다. 원고 한 장 없이 이어진 연설은 정권의 무리한 탄압을 논리적으로 파고들었고, 결국 국회의장의 일방적 폐회 선언을 끌어내며 구속동의안 상정을 막아냈다. 권력의 폭주에 맞선 '막기 위한 설득'의 상징으로 회고되는 이유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명확한 법적·정치적 근거에 기반했다. 먼저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진행 중인 사안임에도 폭로 당사자를 구속하려는 '절차적 모순'을 지적했다. 또 공인이자 제1야당 당수의 도주 및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점을 들어 구속의 법리적 요건이 성립하지 않음을 논증했다. 마지막으로 김 전 대통령은 "행정부 비리를 고발한 의원을 권력에 내어주는 것은 입법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라며 의회주의의 원칙을 내세웠다.

2016년 야당이었던 민주 주도의 테러방지법 저지 필리버스터 역시 192시간26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전국적 이슈로 확산했다. 비록 법안 통과를 최종적으로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국가정보원의 권한 남용과 인권 침해 우려라는 명확한 프레임을 내세워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속기록을 공유하는 등 필리버스터 자체가 거대한 여론전의 장으로 활용했다.

반면 이번 22대 국회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에는 국민의 마음을 관통하는 명확한 메시지가 부재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다수당이 5분의3 의석을 확보하면 24시간 만에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결할 수 있는 국회법의 제도적 한계 속에서, 야당이 이길 유일한 길은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여당 내부를 흔드는 것뿐"이라며 "그러나 최근의 필리버스터는 텅 빈 본회의장에서 의미 없는 말만 쏟아내는 '소음'이 되었고, 이번엔 TK 통합법이라는 맞교환 조건으로 명분마저 흔들리며 투쟁 의지보다 동력 부재를 각인시키는 초라한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의원들 일부는 "필리버스터가 '메시지'보다 시간을 누가 더 많이 채우냐라는 기네스북 대결로 비화한 면이 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한 정치권 관계자는 "국민의힘 의원들조차 자기 당 동료의원이 필리버스터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를 것"이라면서 "본회의장은 텅텅 비어있고, 강행통과는 확정인 데 국민 누가 관심을 가지겠냐. 지금의 필리버스터 남용은 제도의 효용성까지 의심받게 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가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민투표법 전부개정법률안(대안)에 대한 무제한토론을 하고 있던 김정재 의원에게 토론 중단을 요청한 뒤 단상을 내려가고 있다. 송 원내대표는 앞서 더불어민주당에 대구·경북 행정통합 특별법 처리 협조를 요구하며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 교착 상태의 국회… 정쟁 비용은 고스란히 국익 피해로

'필리버스터 돌입-24시간 강제종결-표결'이라는 기계적이고 소모적인 루틴이 고착화되면서 국회의 타협 기능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민주당은 여세를 몰아 3월 임시국회에서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설치법 등 검찰 개혁 법안과 각종 특검법 등을 릴레이로 강행 처리할 방침을 굳혔다. 여당의 무한 질주와 야당의 무의미한 공회전이 연중행사처럼 되풀이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그 사이 국가적 시급을 다투는 중대 의제들은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와 관세 장벽에 선제 대응하기 위해 여야 합의로 띄운 '대미투자특별법' 처리는 야당의 대여 투쟁 지렛대로 전락하며 기약 없이 뒷전으로 밀렸다. 민주당은 대미투자법 등 각종 법안에 국민의힘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오는 10일 국회 본회의를 열어서 처리한다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글로벌 정세 불안으로 중동발 유가 쇼크가 덮치며 실물 경제의 거대한 충격파가 임박했음에도 국회는 여전히 진영 대결과 다가오는 6·3 지방선거의 표심 계산에만 매몰돼 있다는 것 같다"고 불안감을 표출했다. 여야 정쟁에 통합의 기회를 잡지 못한 충청과 대구·경북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절차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거대 여당의 브레이크 없는 입법 독주와 전략과 대안을 상실한 야당의 무기력증이 빚어낸 막대한 정쟁의 청구서는 오로지 국민 몫"이라고 탄식했다.

김윤정 기자 kking152@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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