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넌 용기, 섬의 3·1운동] ② 강화도편 :치밀한 계획, 온 섬을 흔들다

안지섭 기자 2026. 3. 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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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7만2000명 중 2만6500명 참여…전국 최대급 규모
독립선언서 3월 5~6일 도착…교회 중심 치밀한 준비
3월 18일 신문리 장터 2만여 명 운집…백마 탄 유봉진 선두
“우발 아닌 체계적 거사”…공동체 결의 결합
▲ 인천 강화 산후성전에서 만세 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등 인쇄물과 태극기를 만드는 섬 주민들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다. 인천일보가 취재한 산후성전 사진을 AI 이미지 '나노 바나나(Nano Banana)'에 넣어 제작했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고, 100여년 전 강화도에서 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주민들의 결의에 찬 모습을 강조하고자 했다./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일제에 항거하려 했던 주민들의 단결력, 이것이 강화 정신입니다."

1919년 3월 18일 일어난 강화 3·1운동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대규모 시위였다.

당시 강화 인구는 약 7만2000명. 이 가운데 3월 18일 장날 시위에만 2만여 명이 참여했고, 4월 중순까지 이어진 후속 만세 시위 참여 인원까지 합치면 약 2만6500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주민이 참여한 만세 운동이었다.

이는 우발적 군중 봉기가 아니었다. 거사 직전까지 독립운동가들이 수차례 회담을 가지며 역할을 나누고, 지형까지 활용해 체계적으로 준비한 결과였다. 

강화 독립운동가 유경근 지사의 손자 유부열(80) 씨는 "강화 주민들이 대몽항쟁과 병자호란, 병인·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외세와 직접 충돌을 체험한 터라 남다른 저항 정신을 갖고 있었다"며 "(만세 운동이) 성공하려면 치밀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 인천 강화군 길상면 강화초대교회에 3.1운동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삼엄한 감시 속, 독립선언서는 어떻게 섬에 닿았나

강화의 만세운동은 경성의 거점인 조선여관에서 먼저 기획됐다. 강화·김포의 3·1운동 책임자였던 유경근 지사는 조종환에게 길상면 길직리에서 사람을 규합하자는 밀령을 보냈다.

당시 강화는 육지와 연결되지 않아 입도하려면 나룻배를 타고 바닷길을 건너야 했다. 3·1운동 직후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탓에 검문은 곧 체포를 의미했기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조종환을 포함해 황도문·윤종석·오영섭·윤인혁 등 지사들은 3월 5~6일 사이 독립선언서를 숨겨 고향에 입도했다. 

강화 독립지사들은 거사 준비 장소도 신중히 물색했다. 강화 남부가 주요 거점이 됐는데, 강화읍이 있는 북부는 경찰의 감시가 집중됐기 때문이다.

유부열 씨는 "남부인 길상면 길직리는 외딴 곳이라 감시망을 피하기 위한 지리적 여건을 활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부인 강화읍의 거점은 약국과 점포, 교회 등으로 수정됐다.

▲거사 직전까지 흔들렸던 결의

조종환 등이 가져온 선언서는 곧바로 유봉진 지사에게 전달됐다. 유 지사는 1907년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으로, 지역 기독교 지도자였다.

그는 3월 7~8일 길직교회 지도자 장윤백, 황유부, 염성오 등과 접촉해 만세운동을 결의했다. 3월 9일에는 조종환이 길직교회에서 예배 후 신도 모임을 가장해 21명과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거사일을 3월 18일 장날로 정하고, 동지 포섭과 독립선언서와 격려문 인쇄, 태극기 제작 등 역할을 분담했다.

유봉진의 아내 조인애를 비롯한 여성들도 보따리장수로 위장해 교동도와 석모도 등지에 유인물을 전달했으며, 유봉진 역시 3월 12일 주문도에 들어가 100여 명의 교회 신도에게 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했다.

▲ 학생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강화공립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의 모습니다. /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이 무렵 강화읍의 긴장이 높아졌다.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 80여 명이 칠판에 구한국기를 그리고 만세를 외치며 동맹휴학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일경의 감시는 더욱 강화됐다.

상황이 이렇자 길직교회 내부에서 만세 운동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이번 거사는 어렵겠다"는 분위기가 돌았다. 그때 19세 청년 황윤실이 일어섰다.

그는 "이미 만세를 알렸는데 지금 물러선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며 "혼자서라도 장터에 나가 만세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발언은 흔들리던 분위기를 되돌렸고, 거사일은 예정대로 확정됐다.

▲백마 탄 유봉진, 장터를 광장으로 만들다

3월 18일 오후 2시 부내면(현 강화읍) 신문리 장터 한복판에 황윤실, 유희철, 황일남, 장명순 등 네 사람이 태극기와 '조선독립' 깃발을 들고 섰다.

장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쌀과 보리, 농기구를 사고팔던 주민들은 장사를 멈추고 거리로 나섰다. 수천 명이 모였고, 군중은 빠르게 불어났다.

앞에는 전날 주문도에서 돌아와 백마를 타고 나타난 유봉진이 있었다. 그는 군청과 객사, 공자묘 등을 돌며 만세를 이끌었다. 강화군수에게는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고, 경찰서 앞에서는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관철했다.

시위가 고조되며 폭력 조짐도 있었지만, 유봉진은 군중을 진정시키며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이어 다음 날 정오 길상면 온수리에 다시 모이자고 결의한 뒤 밤 11시 일시 해산했다.

이은용 강화3·1운동 기념사업회장은 "정미의병 당시 일본으로부터 큰 피해를 겪은 경험이 있었기에, 무리한 충돌은 피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인천 강화초대교회에서 정영순 원로장로가 강화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봉화로 이어진 저항, 강화도에 남긴 건

일제는 다음 날 일경 10명과 용산 주둔군 40명을 강화에 파견해 주도자 색출에 나섰지만, 이미 강화 전역으로 뻗어나간 시위는 멈출 줄 몰랐다.

대낮에 일제가 총칼로 제재하려 해도 밤에 횃불 시위로 대응했고, 이것마저 통제하려 하자 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4월 15일까지 각 면에서 56회에 달하는 후속 시위가 이어졌고, 6500여 명이 추가로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월 18일 장날 2만여 명, 이후 6500여 명을 합치면 약 2만6500명. 인구 대비 참여율이 36.8%에 달할 만큼 많은 인원이 독립을 외쳤다.

유부열 씨는 "강화는 지리적으론 섬이었지만, 결코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면서 형성된 강화인 특유의 정신이 살아있는 귀중한 도시(寶都)"라며 "만세운동은 유경근을 비롯한 강화지역의 독립지사들이 빈틈없는 책임 완수와 결의로 이뤄낸 항쟁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어린 학생들까지도 참여도 결코 잊어선 안 된다"며 "강화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곧 애국이요, 선열에 대한 보은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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