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숙의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놀 줄 아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하은정 기자 2026. 3. 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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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줄 알고 놀 줄 아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무작정 떠났다. 제주도 3박 4일 나 홀로 여행기.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자신감 하락? 나 혼자 여행으로 분위기 전환?

오래전 직장을 그만둔 데다 공짜 지하철 탑승 나이까지 되고 보니 문제 해결력과 실행력이 빠르게 퇴화 중이다. 새로운 방식과 제품, 변화에 적응하기는커녕 익숙한 것조차 놓치고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인생의 의기소침 구간에 진입. 그러다 작년 말 사라지는 마일리지가 아까워 덜컥 제주행 항공을 예약한 게 기억났다. 내 맘대로 정한 일정이라 동행을 구하기도 그렇고 출발까지 며칠 남지도 않은 상황.

그래, 나 혼자 가는 거야! 그동안 여행을 안 다닌 건 아니지만 오롯이 혼자 갔던 적은 없잖아. 늘 아들이나 총기 있는 친구들에 묻어서 다녔는데,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다녀오자. 나름대로 소소한 도전이니 긴장감도 생기고 기분 전환도 되지 않을까?

숙소는 에어비앤비, 렌트카는 제주 카모아 플랫폼으로 예약 완료. 온라인 정보가 넘쳐나고 이용법도 생각보다 간단했다. 돈 쓰는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게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는 법이니까. 예약만 혼자 했는데도 뭔가 뿌듯하다. 혼자 할 줄도 알고 혼자 놀 줄도 아는 할머니가 되기 위한 연수 기회로 여기고 3박 4일 집을 나섰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회전형 교차로 11시 방향은 어디인가?

국내선 이용은 확실히 편하다. 기내용 캐리어에 액체 반입이 자유로운 건 처음 알았다. 일요일 오후 비행기인데도 만석. 제주공항 도착 후 셔틀을 타고 렌터카 회사로 이동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과제가 렌터카였다. 비용은 저렴해서 아반떼 3일 이용에 보험 포함 6만 원이다. 20년 된 내 차 말고는 다른 차를 운전해 본 경험이 없는 기계치, 길치인지라 일단 긴장 모드 돌입. 심지어 접수와 차량 인수를 무인으로 진행한다. 겨우 직원 한 사람을 붙잡고 시동 걸고 끄는 법, 와이퍼 작동, 내비 이용 정도의 단답형 대답을 들은 후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내가 직진은 잘 하니까.

막상 운전은 문제가 없는데, 내비님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놓칠 새라 초집중하느라 피곤했다. 회전형 교차로는 왜 이리 많은지. 두 번째 출구는 어디이고 11시 방향은 또 어디라는 건지. 아, 헷갈려. 뻥 뚫린 길 조금만 달리면 여기저기 제한 속도가 출몰하고, 학교도 자주 나타나 시속 30킬로를 유지해야 했다. 아, 힘들어.

어둠 속의 황량한 숙소, 현관문은 왜 안 열리는가?

숙소는 서귀포 성산읍의 한적한 시골 동네. 1인실 방 3개와 각 남녀 욕실의 본채, 공용 공간인 주방 겸 카페가 별채로 구성된 단독주택이다. 바닷가는 아니지만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위치, 심플하면서 깔끔한 실내 사진이 마음을 끄는 곳이었다. 3박에 20만 원 정도,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다.

1시간여 운전 끝에 내비는 그곳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어라 집 전체가 불 하나 없는 암흑천지에 간판도 없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외관, 바람까지 몰아쳐 황당하고 황량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주소가 맞긴 하다. 사방을 경계하며 주인이 알려준 긴 안내 문자 끝에 발견한 현관 비번을 눌렀다. 헉, 문이 안 열린다. 뭐지??? 침착하자, 침착해. 음, 비번 뒤에 체크 표시도 눌러야 하는 거였구나.

우여곡절 끝에 입성 성공. 다행히 실내는 훈훈했다. 내가 예약한 방에 꽂혀 있는 열쇠를 돌려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나 혼자인가? 살짝 막막한 심정. 어찌 됐든 기나긴 밤, 저녁을 굶을 수는 없다. 도보 10여 분 거리에 영업 중인 식당을 찾아내 밥을 먹으러 나섰다. 쇠락한 느낌의 낯선 시골길을 밤에 혼자 걷자니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나는야 대한민국의 씩씩한 60대 여자. 고등어구이로 첫 번째 혼밥을 완수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차가 한 대 더 들어와 있고 한 청년이 카페 공간에서 포장 음식을 먹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외따로 떨어진 집에 둘뿐이니 은근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안전한 게 좋겠지. 자기 전 방문을 꼭 잠그다가 갑자기 현타가 왔다. 지금 그 젊은이가 자기 엄마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나를 경계하며 방문을 꼭 잠갔을지도 모르잖아. 흐흐흐.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나 혼자 여행, 또 가고 싶냐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제주 즐기기에 나섰다. 페북에 제주 간다고 올렸더니 맛집과 가볼 만한 곳을 지역별로 리스트업해 준 귀인의 등장과 블로그 검색의 도움으로 여행은 순조로웠다. 맛집과 카페 방문을 메인에 두고, 오름도 오르고 바닷가 노을도 보고 유명 전시도 관람하고 시장도 다녔다. 3일 차는 하루 종일 비와 강풍주의보 날씨 탓에 돌고래 영접 스폿과 해변 걷기 등을 포기하고 강제 우중 드라이빙을 즐겨야 했지만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다음에 오면 서귀포일주도로와 중산간동로는 동네 길처럼 익숙하게 다닐 테다. 마지막 날도 비가 뿌렸지만,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제주의 봄 냄새를 맡았다. 조금, 행복해졌다.

이 나이에 혼자 여행을 다녀오니 왠지 뿌듯하다. 나의 능력치가 한 단계 상승한 기분이다. 사실 제주는 혼자 다니는 사람도 많고 여행 인프라도 잘 되어 있어서 나 홀로 여행에 불편함이 없는 곳이다. 돌아온 뒤 후배가 물었다. 다음에도 혼자 가고 싶으냐고. 물론이지. 다음에는 더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동행이 있어도 좋겠다. 말할 사람이 없어서 ChatGPT랑 대화했다는 건 비밀이다.

글쓴이 이은숙 얼마 전부터 공손한 자세로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한 60대. 30년 동안 여성지를 만들었고, 퇴직 후 무식해서 용감하게 어르신 학습지를 창업했다. 지금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여전히 진로 고민 중이다.

하은정 기자 hah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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