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81. 칠처가람

강시일 기자 2026. 3. 2.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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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전하는 신라 칠처가람의 설화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불상과 석탑, 기초석 등의 흔적들
분황사와 황룡사 경게지점에 남아 있는 보물 분황사 당간지주.

신라는 불국토였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부터 신라에는 이미 일곱 절터가 있었다. 가장 약체로 분류되던 신라가 불교의 힘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했다는 평가에서도 불국토라는 대명사는 성립한다.

당시 불교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국가 통치이념이자 철학이고 삶의 방식이었다. 학문의 기본적인 바탕이었고, 문학과 예술, 과학, 건축 등 종합이론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신라 불교를 견인한 대표적인 사찰이 칠처가람이다. 황룡사·흥륜사·영묘사·분황사·영흥사·담엄사·사천왕사가 그 이름이다. 신라시대의 칠처가람들은 당시 이야기를 상징하듯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최근 발굴 과정에서 드러나 복원되고 있는 분황사 원지.

◆ 신화전설 1: 불국토의 칠처가람

삼국유사는 칠처가람을 소개하면서 신라가 불국토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고도녕이다. 240~248년에 조조의 위나라 사람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녕을 만나 아도를 낳았다. 아도는 다섯 살 때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했다. 열여섯에 위나라로 가서 아버지 굴마를 만나고, 현창화상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했다. 열아홉 살에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이때 어머니가 신라의 불교에 대해 설명했다. 신라는 이제껏 불교를 모르고 있다. "지금부터 3천여 달이 지난 다음 계림국에 성왕이 나타나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서라벌에는 이미 일곱 군데의 가람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 둘째는 삼천기, 셋째는 용궁의 남쪽, 넷째는 용궁의 북쪽, 다섯째는 사천의 끝, 여섯째는 신유림, 일곱째는 서청전이다."

"모두 전생의 부처님 때 가람터요 불법의 물이 흐를 땅이다. 너는 거기에 가서 큰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마땅히 동쪽에서 부처님 앞에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해야 한다." 아도는 불교를 전파하러 계림에 이르러 왕성의 서쪽 마을 엄장사에 머물렀다. 그때는 미추왕이 즉위한 지 2년인 계미년(263)이었다. 궁궐로 들어가 불법을 가르치겠다고 청했으나 이전에 보지 못한 바라 꺼려하며 죽이려고까지 했다. 아도는 피신하여 속림에 있는 모록의 집에 숨었다.
황룡사구층목탑의 존재를 웅변하고 있는 황룡사지의 심초석.

미추왕 3년에 성국공주가 병에 걸렸으나 궁중의 의사들이 고치질 못하자 사방으로 사신을 보내 의사를 찾았다. 아도는 스스럼없이 대궐로 나아가 그 병을 깨끗이 고쳐냈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물었다.

"하찮은 중은 아무것도 얻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나라를 위해 복을 빌고자 할 따름입니다." 왕이 허락하고 명령을 내려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 풍속이 질박하고 검소하여 띠를 엮어 집을 세우고 살면서 가르쳤다. 때때로 하늘에서 꽃이 땅에 내리기도 하였다. 이름은 흥륜사이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인데 스님에게 와서 비구니가 되었다. 세 지류가 만나는 삼천지에도 절을 짓고 살았다. 이름은 영흥사이다.

미추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고 하였다. 스님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손수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결했다.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자 이 때문에 불교도 없어져 버렸다.

신라 23대 법흥왕이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켰다. 미추왕의 계미년(263)과 거리가 252년이니 고도녕이 말한 3천여 달이 증명된 것이다.
영묘사지에 들어 선 흥륜사 대웅전.

◆ 흔적: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선덕여왕이 창건한 분황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을 끄는 것은 낮고도 묵직한 모전석탑이다. 벽돌로 쌓아올린 3층석탑 형태로 남아 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9층석탑이었다는 기록이다.

이 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신라 최초의 모전석탑이다. 부드러운 흙빛을 띤 안산암이 층층이 포개져 있고, 넓은 기단이 그 무게를 받치고 있다. 탑 네 면에는 감실이 있어 불상을 모셨던 자리로 짐작게 한다. 감실 양쪽에는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는데, 근육이 도드라진 몸과 단단히 쥔 주먹이 천 년이 지나도 탑을 지키는 수호신의 기세를 전한다.

기단 모서리에 놓인 석사자도 이 탑의 개성을 더한다. 입을 벌리고 앞발을 세운 사자상은 내륙을 향해 포효하듯 서 있고, 바다 쪽을 바라보는 면에는 물개를 닮은 짐승이 역동적인 자세로 몸을 틀고 있다.
오릉 사적지 풀숲에 누워있는 담엄사지 당간지주.

지금도 분황사 동쪽 담장 밖에는 옮겨 쌓아둔 탑의 부재가 남아 있다. 이 석재들이 9층석탑이었다는 기록을 증언하고 있다. 모전석탑은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수리되면서 기존 구조가 변형됐다. 돌과 돌 사이를 잇는 재료로 전통적인 흙과 회반죽 대신 시멘트 모르타르가 사용됐다. 오늘날 보수 전문가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탑의 숨을 막는 재료"라고 평가하는 그 시멘트다. 당시엔 근대식 공법이라 여겼겠지만 문화재 수리의 한계를 드러내는 흔적이기도 하다.

그 대신 이 수리 덕분에 탑이 품고 있던 비밀 하나가 드러났다. 2층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이다. 이때 나온 유물 가운데 하나가 '화주(火珠)'다. 빛깔이 맑은 수정과 같고 햇빛을 받으면 불씨가 생겨 솜에 불이 붙었다고 전한다. 태양에서 불을 데려오는 구슬, 그래서 이름도 불 화(火) 자를 써 화주가 됐다. 사람들은 이 구슬이 선덕여왕이 쓰던 수정 돋보기였다고 믿어 왔다.

물론 화주가 실제로 선덕여왕의 손에 쥐어졌는지, 학계의 정설로 굳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황사 모전석탑이 신라 여왕의 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물이자 불교의 힘을 빌려 왕권을 신성화하려 했던 상징물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여왕이 나라를 이끌던 시기의 경주는 이 탑을 통해 하늘과 부처, 백성을 잇는 통치의 이미지를 세상에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오늘 분황사 마당에서 모전석탑을 올려다보면 눈높이에서 멈춘 3층 탑신이 오히려 묵직하게 다가온다. 전쟁과 식민지의 시간을 견디며 잘려 나간 6층, 시멘트로 붙잡힌 돌틈, 동쪽 담장 밖에 쌓여있는 탑재가 모두 이 탑의 그림자를 이룬다. 높이를 잃고 난 뒤에야 이 탑이 지켜온 시간과 기억의 두께를 더 또렷이 느끼게 된다. 선덕여왕이 바라보았을 9층 고탑의 모습은 이제 기록과 상상 속에만 남았다.
발굴 100년 만에 퍼즐을 맞춰 재현하고 있는 사천왕사지의 목탑 기단부.

◆ 신화전설 2: 칠처가람 다시 읽기

신라 칠처가람은 다양한 역사와 신화의 모습으로 전하고 있다. 건물과 불상, 탑, 종각과 같은 절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지만 주춧돌과 기록으로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사천왕사: 사천왕사는 문두루비법을 시전하기 위해 문무왕이 세운 대표적인 호국사찰이다. 당나라가 신라를 범하기 위해 50만 대군을 출병했다는 소식이 신라왕실에 전해졌다. 다급해진 문무왕이 명랑법사를 불러 대책을 마련하게 했다. 절을 지을 시간이 없었다. 명랑은 유가명승 12명과 함께 오채색 비단으로 벽을 두르고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당나라 대군을 수장시켜 나라를 지켰다.

1천300여년이 지나 절터를 발굴해 역사 현장을 확인하고 있다. 당간지주와 귀부, 이곳저곳에서 드러난 주춧돌을 근간으로 호미와 붓으로 흔적을 찾았다. 양지스님이 조각한 것으로 전하는 신상들의 퍼즐은 발굴 100년 만에 제 모습을 갖췄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각각 보관하고 있던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수수께끼를 풀었다. 목탑의 기단부로 쓰였던 신상들의 모습을 재현해 천년 전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다.
남천과 서천의 세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영흥사지.

*황룡사: 신라 최대의 사찰 황룡사 규모는 이제 거의 밝혀지고 있다. 진흥왕이 17년 만에 가람을 완성하고 장륙존상을 들여와 거대한 불전을 마련했다. 진지왕, 진평왕시대의 역사를 거쳐 선덕여왕이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우면서 황룡사 100년의 역사가 완성됐다. 황룡사의 역사는 주춧돌과 182㎝에 이르는 치미를 발굴하면서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건설하는 과정에 황룡이 나타나고, 진흥왕의 백고강좌, 원광법사의 입적, 솔거의 벽화, 아소카왕의 염원 장륙존상 건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강좌, 황룡사구층목탑의 심초석과 같은 설화와 흔적이 남아있다.

*흥륜사와 영묘사: 흥륜사와 영묘사는 묘하게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도 기이하게 엮여있다. 법흥왕이 불교를 처음 공인하면서 최초의 국가사찰로 건립한 흥륜사는 법흥왕과 진흥왕이 말년에 법복을 입고 입적한 기록이 전한다. 영묘사는 비구니사찰로 선덕여왕이 설립해 지귀설화, 여왕의 지혜를 가늠하게 하는 옥문지와 백제군사 섬멸 설화가 전한다.

현재 흥륜사 현판이 걸려있는 절터에서 '영묘사' 명문이 적힌 기와조각이 출토되면서 이곳이 영묘사터라고 밝혀졌다. 신라시대 흥륜사는 현재 경주공고 부지에 남은 석재들이 그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웅변한다.
경주공고 교정 곳곳에 남아 있는 흥륜사지의 석재.

*분황사: 선덕여왕이 건립했다는 기록과 함께 광덕과 엄장, 자장율사, 원효의 집필과 소상, 맹아득안, 원성왕의 변룡어정 등의 설화가 남아있다. 당시 흔적으로 우물과 약사불, 모전석탑이 신라시대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일제강점기 발굴에서 선덕여왕의 화주가 나왔다. 삼층으로 복원된 모전석탑은 최초 구층으로 지었다는 것은 기록과 절터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벽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담엄사와 영흥사: 신라시대 절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칠처가람 가운데 담엄사와 영흥사 이름이 남는다. 담엄사는 오릉 사적지 풀숲에 엎드린 당간지주를 통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영흥사는 단지 세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라는 기록으로 현재 야구장이 파크골프장으로 조성되고 있는 서천변으로 짐작될 뿐이다. 영흥사에 법흥왕과 진흥왕의 왕비가 세속의 옷을 벗고 비구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담엄사 인근의 못가에서 고려시대 역사가 의종의 허리를 부러뜨려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담엄사와 영흥사는 아직 채워야 할 신라의 빈칸으로 존재한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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