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사랑을 믿고 건넌 바다, 그 땅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이수진의 이혼 이야기]

이수진 2026. 3. 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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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비자로 낯선 땅을 밟은 아내, 이혼 순간 비자·신용·이동수단 모두 잃고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남도일보·AI 생성 이미지

비행기에서 내리던 날을 기억합니다. 짐을 끌고 입국장을 빠져나오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설렘과 낯섦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아내는 앞장 서 걷는 남편 뒤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따랐습니다. 공항 천장에 걸린 영어 표지판들이 낯설었지만,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진 몰랐을 것입니다. 무작정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위태로운 선택이 될 줄은.

미국 취업비자를 가진 배우자를 따라 입국한 아내에게 발급되는 비자가 이른바 '동반 비자(Dependent Visa)'입니다. 이름부터 종속과 의존, 독립된 자격이 아니라 누군가의 신분에 매달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남편의 비자 상태가 유효해야만 아내도 합법적으로 미국 땅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 그 전제는 함께 무너집니다. 아내는 독립적인 취업 자격도, 독자적인 신용 이력도 없으며, 이 나라의 어떤 공적인 기록에도 나 '○○○'의 이름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혼 전 한국에서 쌓아온 직업 경력, 금융 이력, 사회적 관계망은 태평양 건너에 남겨두고 왔습니다.

이민은 때로 한 사람을 제로(0)로 초기화합니다. 그리고 그 초기화된 상태에서 관계가 파탄 나면, 아내는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 홀로 서게 됩니다.

제 의뢰인이었던 그녀의 가족은 현지 교민 커뮤니티에서 성공한 집안으로 통했습니다. 독일산 외제차 2대를 몰았고 아이들은 사립학교에 다녔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에 대한 종속이 심해지자 '정서적 학대'가 이어졌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집에 남겨둔 채 아이들만 외식을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한 번, 그것이 두 번이 되고, 이윽고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서서히 엄마를 그 집의 구성원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을 건네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같은 공간에 있으되 없는 사람처럼 대했습니다.

"감옥도 밥은 주는데." 그녀가 제게 했던 말입니다. 법률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이 그랬습니다.

가정폭력은 반드시 주먹의 형태로 오지 않습니다. 존재를 지우는 것, 한 인간을 같은 지붕 아래에서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것, 그것 역시 폭력입니다. 미국 경찰은 이를 정서적·경제적 학대(Emotional and Financial Abuse)로 규정하고 있으며, 아내는 이미 수 차례 경찰 리포트를 접수했습니다.

이혼 소송이 시작되자 남편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영주권 신청 서류에 당신 이름은 없다고. L2 비자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으니 곧 추방될 것이라고. 조용히 사라지든가, 아니면 이 나라에서 불법 체류자가 되든가 선택하라고.

아내의 신용카드는 정지되었습니다. 차 키는 압수된 지 오래였습니다. 미국에서 차 없이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은, 한쪽 다리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 생필품을 살 수도, 관공서를 찾아갈 수도, 변호사를 만나러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아내는 살아남기 위해 한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허리와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매일 저녁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혼 상담을 하면서 국제 이혼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늘 같은 것을 먼저 묻습니다. 그 나라로 떠나기 전, 당신의 이름은 어디에 적혀 있었냐고. 비자에, 계좌에, 보험에, 임대 계약서에. 당신은 그 땅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냐고.

이 경우 한국에 있는 부동산, 미국에 있는 자산, 어느 나라 법원이 어느 재산에 관할권을 갖는지를 두고 다툼이 시작됩니다. 국제 이혼에서 관할권의 공백은 때로 약자를 삼킵니다. 재산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분쟁의 무게추가 달라지고, 이를 아는 쪽이 모르는 쪽을 상대로 싸움을 설계합니다.

사랑은 국경을 넘습니다. 그러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따라 낯선 땅으로 건너가는 것은 때로 용기 있는 선택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법적 기반을 완전히 상대방에게 맡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실을 출국 전에 알고 준비하는 것과, 파탄 이후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 사이에는, 때로 한 사람의 삶 전체만큼의 거리가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여성 쉘터 입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선택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운 일인지, 저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문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를 따라 바다를 건너기 전, 우리는 한 번쯤 물어야 합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의 관계가 끝난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게 됩니까. 그 대답을 미리 갖고 있는 것이, 사랑을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수진 변호사 ·법무법인 수림
이수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