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은행에 내 돈 못 맡겨"…거리에 퍼진 '금융적 항거'[금융 히스토리]
'저축심 냉각' 총독부 기록도…'금융 보이콧'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던 조선의 거리. 하지만 그 항거는 거리에서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의 통장과 돈이 또 다른 무기가 됐습니다. 일제와 밀착한 금융기관을 향한 분노는 금융적 저항으로 이어졌습니다. 한성은행 대규모 인출 사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민족 자본의 상징에서 친일파 은행으로…"돈으로 심판"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은 조선인들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은행이었습니다. 설립 초기에는 당나귀를 담보로 대출을 해줄 만큼 조선 상인과 밀착된 민족계 금융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경영진이 철저히 친일파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1911년부터 은행장을 맡은 이윤용은 '매국노' 이완용의 형으로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 귀족이었습니다. 전무이사 한상룡 또한 이완용의 외조카이기도 하면서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습니다.
민족계 은행이 친일 자본의 산실로 변질되면서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3·1운동의 불꽃이 일자, 조선인들은 거리의 만세 시위를 넘어 경제적 응징에 나섰습니다. 바로 '예금 인출'을 통한 금융적 항거였습니다.
당시 예금주들은 자신의 돈이 친일 경영진의 사업자금이나 식민 통치 자금으로 쓰이는 것을 거부하며 대규모로 현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3·1운동 직후 한성은행 등 민족계 은행에서 빠져나간 돈이 당시 기준으로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에 육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자금난에 직면한 은행…일본계 은행에 손 벌리다
대규모 인출 사태는 곧 은행의 유동성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1920년대 초 경제 공황이 맞물리면서 한성은행은 심각한 자금 압박에 직면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일본계 은행인 '다이이치 은행'으로부터 200만원의 구제자금을 융자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경영 구조도 바꼈습니다. 1922년부터 일본인의 경영참여가 허용됐고 전무와 은행장 자리를 일본인이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1928년에는 일제의 특수은행인 조선식산은행이 대주주가 되면서 한성은행은 일본의 식민 금융 기구로 완전히 편입됐습니다.
■ “저축심 급격히 냉각”…식민 금융 질서를 흔들다
예금인출 사건만이 아닙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내부 보고서에는 3.1운동 이후 조선인 사회에 일본계 금융기관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확산돼 '저축심이 급격히 냉각됐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단순한 감정적 반발을 넘어서 일제 금융 시스템 자체를 거부한 '보이콧'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총과 칼 없이도, 예금 인출은 식민 통치의 자금줄을 타격한 강력한 항거로 자리잡았습니다. 금융기관을 향한 집단적 예금 인출은 조선인의 경제 영역에서도 주권 인식을 드러낸 사례가 된 거죠.
김소현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
- 홍진영, 머니투데이방송 '3.1절 기념 마라톤' 달군 상큼 응원가 [MTN 현장+]
-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 월요일 금융시장 어디까지 흔드나[천조국 리포트]
- 중동 하늘길 폐쇄에 대한항공 5일까지 인천~두바이 항공편 운항 중단
- 박병창 이사 "코스피 7000, 충분히 가능...하반기는 유동성이 변수" [경제일타강사]
- 산업부, '이란 사태'에 실물경제 영향 긴급 점검…"필요시 비축유 방출"
- 2월 수출 675억달러로 29%↑…반도체 역대 최대 실적
- 구윤철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성 기민하게 대응"…범정부 비상대응반 가동
- 전통문화와 K팝 힙한 만남...국중박의 이유 있는 블랙핑크 '픽' [엔터그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