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과거의 사건이 아닌 ‘시민이 역사를 바꾼 순간’으로 설명”
“3·1운동은 150만 명 안팎 참여한 거족적 항쟁”
오늘은 107주년 3·1절이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 저항의 출발점이다.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3·1절의 역사적 의미는 시간이 흐르며 점차 일상에서 멀어지고 있다. 기념일은 남았지만, 그날의 함성과 정신을 깊이 되새기는 노력은 줄어드는 현실이다.

- 3·1운동에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나.
"참가자 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결론은 하나로 모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사 결과를 반영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약 202만 명으로 봤고,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은 136만 명으로 추산했다. 일제 총독부도 100만 명 이상을 인정했다.
201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관련 문헌을 종합 분석한 결과 1798건의 시위에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했다. 다만 자료의 상당수가 식민 권력의 기록이라는 한계를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더 컸을 가능성이 있다. 종합하면 100만~200만 명, 평균 150만 명 안팎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약 1700만 명이었다. 10명 중 1명이 거리로 나선 셈이다. 1가구 평균 5명 기준으로 보면, 시위가 벌어진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집에서 한 사람이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3·1운동은 특정 지도층의 사건이 아닌 농민·상인·학생·종교인이 함께한 전 민족적 거족적 역사였다."
- 3·1운동은 서울 중심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의 실제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오히려 통계를 보면 경기도의 비중이 크다. 전국 약 1692건의 만세 시위 가운데 367건이 경기도에서 발생했다. 다섯 번 중 한 번꼴로 경기도에서 만세 함성이 울린 셈이다.
참여 인원은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전국 참가자의 약 20%다. 3·1운동에 나선 다섯 명 중 한 명은 경기도 사람이었다는 의미다.
시위 과정에서 순국자는 140여 명으로 추산된다. 전국 희생자의 약 15% 이상이다. 이런 수치를 보면 3·1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됐지만 경기도 전역의 마을과 장터, 학교에서 살아 움직인 거대한 민중 운동이었다."
-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한 동력은 무엇이었나. 당시 여건에서 확산 속도는 어땠나.
"3·1운동 핵심은 독립선언서였다. 선언서가 대량 인쇄돼 천도교 교구망을 통해 각지로 전달됐다. 교회와 종교 조직이 연락망이 됐고, 장날과 읍내 같은 군중 공간이 결합하면서 시위는 빠르게 확산됐다.
실제로 3월 1~2일 사이 이미 여러 지역에 선언서가 퍼졌다. 경기도는 3월 3일 개성 시위가 확인된다. 하루 이틀 단위의 연쇄 확산이었다. 전화·전보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종이와 사람의 이동, 철도와 장터를 따라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 4월 들어 만세운동이 급격히 소강 상태로 접어든 배경은 무엇인가. 총독부의 무력 탄압이 결정적 요인이었나.
"가장 큰 요인은 일본의 전면적 무력 탄압이었다. 3월 말 시위가 절정에 이르자 일제는 헌병·경찰 1만 3000여 명을 동원했다. 4월에는 보병부대까지 증파해 진압을 강화했다.
현장에서는 학살과 방화같은 극단적 폭력이 이어졌다. 평안남도 맹산에서 일본군 발포로 50여 명이 희생됐고, 경기도 제암리에서는 민간인을 집단 살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런 탄압으로 공포가 확산되며 시위 동력이 크게 약화됐다.
그러나 거리의 만세가 줄었을 뿐 운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3·1운동의 에너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1920년대 이후 국내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단계로 전환됐다."
- 일제의 군·경 투입과 집단 체포, 즉결 처분은 현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체포·사상자 규모는 어느 정도로 파악되나.
"3·1운동의 만세 시위는 목숨을 건 항거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사망자는 약 780~1148명이다. 이는 최소치에 가깝다. 축소 보고 정황도 있다. 당시 조선헌병대도 부상 후 사망자는 파악이 어렵다고 인정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신고되지 않은 사망자도 많아 확인된 희생자만 수천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외국 선교사 기록에는 더 많은 희생이 언급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제시한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은 단순 과장으로 보기 어렵다. 3·1운동 만세 시위는 대규모 참여와 막대한 희생을 동반한 항쟁이었다.
한편, 헌병과 경찰은 총 2만 8934명의 체포자를 분류해 단순 참여자는 즉결 처분하고, 주동자는 검사국에 송치했다."
- 4월 이후 만세 운동의 에너지가 임시정부 수립 등 새로운 노선으로 전환됐다는 평가가 있다. 현장 시위와 외교·무장 노선의 관계를 어떻게 보나.
"3·1운동의 함성은 5월에 멈춘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거리의 만세가 잦아든 자리에서 독립운동은 더 깊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은 그 상징적 전환이었다.
만세운동이 민중의 마음속에 독립이라는 이름을 새겼다면, 임시정부는 그 의지를 국가 형태로 조직화한 첫 시도였다. 이후 외교와 무장이라는 노선은 방식은 달랐지만 뿌리는 하나였다. 3·1 운동이 민족을 거리로 불러냈다면, 임시정부 이후 독립운동은 민족을 역사 속 주체로 세우는 과정이었다."
- 3·1운동을 실패로 볼 것인가, 성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역사적 성과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나.
"3·1 운동을 실패로 보는 평가는 단기적 결과에 머문 시각이다. 비록 1919년 독립을 이루지 못했고 만세운동은 탄압 속에 멈췄지만 역사의 방향은 그때 바뀌었다.
한말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힘이 하나로 결집했다. 독립운동은 일부가 아닌 민족 전체의 과제가 됐다. 그 결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을 국가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후 이런 변화는 1920년대 독립운동으로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3·1운동은 실패가 아니라 민족을 깨우고 대한민국과 민주주의의 출발을 연 역사적 분수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유관순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지역 만세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배경은 무엇인가.
"유관순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사건 자체보다 이후 형성된 역사적 상징성에서 의미가 크다. 1919년 병천 아우내 장터 시위는 수많은 지역 만세운동 가운데 하나였지만, 17세 학생 유관순이 이를 주도하고 체포 뒤 법정과 옥중에서 끝까지 항거하다 순국한 과정이 강한 서사를 만들었다. 특히 만세 시위 중 부모가 일본 헌병의 발포로 희생되고 오빠까지 고문을 당한 비극은 상징성을 더욱 강화했다.
유관순은 일제강점기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방 이후 유관순 노래가 만들어졌고 영화도 세 차례 만들어졌다. 고향인 천안과 모교인 이화여고 내에 유관순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유관순을 주제로 하는 연극도 공연되고 전시회도 개최됐으며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제작되면서, 3·1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고 영화 '항거'가 개봉하면서 다시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결국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한 인물의 삶과 기억이 결합해 지역 만세운동이 전국적 기억으로 확장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 3·1운동을 계기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가. 이후 여성 독립운동과의 연속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3·1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바꾼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전에도 여성운동은 존재했지만 주변에 머물렀다. 그러나 1919년 봄, 여학생과 교사, 전도부인들이 거리로 나서 만세를 외치면서 여성은 처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시위와 투옥, 재판의 경험은 여성에게 새로운 정치 공간을 열어 주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남녀평등과 여성 참정권이 명문화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1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여성 네트워크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근우회 같은 조직으로 이어지며 독립자금 모금과 대중운동을 이끌었다. 나아가 일부 여성은 무장투쟁의 현장으로까지 나아갔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은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순국한 여성 무장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결국 3·1운동은 여성 참여를 일회적 사건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여성운동을 사회운동이자 독립운동으로 확장시킨 출발점이었다. 이후 여성 독립운동의 흐름은 1919년 봄 거리에서 깨어난 여성의 정치적 각성 위에서 길게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 107주년을 맞는 올해, 3·1운동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107주년을 맞은 오늘, 3·1운동의 메시지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첫째, 국민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이다. 만세운동은 식민지 백성이 스스로 주권자임을 선언한 사건으로, 임시정부와 민주공화국의 출발로 이어졌다.
둘째, 민주주의는 행동으로 지켜진다는 교훈이다. 비폭력 만세의 전통은 이후 민주화 운동과 시민 행동의 뿌리가 되었다.
셋째, 시대를 향한 질문이다. '독립선언서'가 말한 자유·평등·인류 보편 가치가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되묻게 한다.
결국 3·1운동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더 책임 있는 공동체로 나아가라는 역사적 요청이다."
- 미래 세대에게 3·1운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만세'라는 상징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낸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미래 세대에게 3·1운동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시민이 역사를 바꾼 순간'으로 설명해야 한다. 당시 만세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독립정신을 깨우는 선언이었다. 오늘의 언어로 풀면 '만세'는 주권자의 자기 선언이다. 침묵하지 않고 스스로의 권리와 존엄을 드러내는 시민의 목소리, 곧 참여와 연대의 다른 이름이다.
실제로 3·1운동의 비폭력 시위 전통은 이후 민주화 운동과 시민 행동으로 이어졌고, 오늘의 직접민주주의 문화로 남아 있다.
따라서 미래 세대에게 '만세'란 태극기를 흔드는 장면이 아니라 "나는 이 사회의 주인이다"라고 말하는 용기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3·1운동은 과거의 함성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시민의 문장이다."
/글·사진 장선 기자 now482@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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