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도 삶의 일부다…괜찮아, 지나간다

한겨레 2026. 3. 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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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하는 정신과 의사 김세희의 ‘마인드 업’] 20
게티이미지뱅크코리아

엘리트 운동선수들이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주요 대회에서 신기록을 달성하고 메달을 따고 큰 성취감을 맛보고 나면 한동안 우울감을 경험한다.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담금질하며 원하는 목표에 달성한 만큼 상대적으로 깊은 무기력감에 빠진다. 환희가 큰 만큼 이후 찾아오는 상실감과 허탈감도 클 수밖에 없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박차를 가해 도달하고 나면 한동안은 몸도 마음도 무겁다. 새로 시작하고 도전하는 것이 귀찮을 수 있다. 당연한 순리다. 에너지를 쓰고 나면 우리 몸은 다시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절전모드로 변환한다. 우울감 무기력감은 삶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이다.

에너지 회복 없이 또 소모하면 ‘방전

기분과 신체 컨디션이 다운되면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게 어려워지고, 이 시기를 견뎌내는 것이 참 힘겹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우곤 한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새로운 곳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실연 뒤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마라톤 대회를 완주하고 나서는 다른 대회를 나가려고 준비한다. 이 방법도 효과는 있다. 그런데 에너지 손실 후 미처 다 회복하지 못하고 새로운 계획으로 또 에너지를 고갈하면 결국 더 크게 방전될 수밖에 없다.

“선생님, 제가 작년 한 해 너무 힘들었어요.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진료받으면서 그나마 버텼거든요. 더는 안될 것 같아서 이번에 보직을 내려놓기로 했어요. 이게 맞는 결정인지 모르겠는데, 그걸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력조차 없네요.”

“진우님, ‘나는 무엇이 어떻게 힘들다’고 느끼고 있나요?”

“상사의 지시를 듣고 업무를 분배하고, 그 과정에서 의견을 조율하면서 탈 없이 진행해야 하는데, 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자꾸 반복되어요.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에너지도 없고 저 스스로 참고 진행할 수 있는 인내심도 없네요.”

“잠은 잘 주무시는지요?몸이 아픈 데는 없으세요?”

“선생님, 그런데 제가 이게 심리적으로 지친 건지, 업무가 힘든 건지, 체력이 달리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보직을 내려놓는 결정이 계획했던 게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만두기로 한 것이라, ‘나 이제 망한 것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절정기 이후엔 쇠퇴기

중년 이후 삶에 들어서면 일상, 업무, 관계 등에서 성취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시기가 있다. 맡은 책임과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신체 능력도 떨어지고, 두뇌 회전도 이전 같지 않다. 프로 바둑 기사의 승률이 가장 높은 절정기는 10대 후반에서 20대라 한다. 계산, 순발력, 유연한 사고 등 바둑에 필요한 두뇌의 기능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 이후로는 집중력도 떨어지고, 실력도 저하된다. 영역마다 다르지만, 절정기 이후에는 쇠퇴기를 맞게 된다. 몸에 일어나는 변화, 뇌 기능의 변화를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늙는지도 모르고 세월을 보내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눈앞에 닥친 일에 급급하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 채, 아침에 안개가 피었다 사라지는 것처럼 그냥 하루하루가 사라진다.

마라톤 완주 뒤엔 ‘포스트 레이스 블루스’

42.195km 마라톤을 달리려면 보통 3개월에서 4개월 정도 훈련한다. 체계적인 훈련과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마라톤 대회를 준비한다. 페이스를 유지하고 계획대로 잘 달려도 마라톤 대회가 끝나면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고갈되기 마련이다. 매일 밤낮으로 연습해도 대회 당일 42.195km 마라톤을 달리는 시간은 참 고되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주로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내가 현재 속도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고비를 맞지는 않을까?’ 에너지 배분에 집중하며 몸의 상태도 수시로 살펴야 한다.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돌풍이 부는 등 기상 상황도 변수로 작용한다. 이렇듯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는 3~5시간 동안 몸도 뇌도 쉴 틈 없이 돌아간다.

대회 이후 상당 기간은 무기력하고 신체 컨디션과 기분이 평상시보다 다운되는 데 이를 ‘포스트 레이스 블루스(post race blues)’라고 부르기도 한다.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이해해 보자면 도파민 상승으로 인한 희열을 맛본 이후 상대적인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시간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 근육의 섬유가 뭉쳐 있고 젖산 등 피로 물질이 쌓여 실제로 몸이 무겁기도 하다.

그러나 희열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이 피로와 무기력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회복되고 옅어진다. 그런데 이 기간이 유독 괴롭고 힘들다. 때로는 대회 후유증이 겁나서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는 게 꺼려지고 피하고 싶다.

내 마음, 생각, 느낌들을 인지하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기력감도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레이스 계획에는 레이스 후 회복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회복은 신체적 회복뿐 아니라 심리적 회복까지 포함한다. 미리 알고 있으면 당황하지 않는다. 이미 올 거란 걸 준비했기 때문에 ‘괜찮다’, ‘지나갈 것이다’ 다독이며 무기력한 시기를 견뎌낸다. 어둠 속에 머무르더라도 희미한 빛의 방향을 느끼고 찾을 수 있다. 머지않아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출구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려면, 나의 현재 상태를 인지하고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현재는 과거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지고, 이것이 미래를 결정한다. 하루 중 시간을 내어 눈을 지그시 감고, 배꼽 쪽을 응시하며,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어보자.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볼록 나오는 느낌을 느끼고, 숨을 내쉴 때 배가 들어가는 느낌을 느껴본다. 하루 중 있었던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떠올려본다. 이것이 마음이다. 마음의 생각과 느낌들을 느껴보자.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이런 느낌이 일어나는구나.’ ‘이런 감정이 드는구나.’

※이 글의 상담 사례로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실제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마라톤 하는 정신과 의사 김세희의 ‘마인드 업’은?

김세희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임상교수는 세계 6대 메이저 베를린·보스턴·도쿄·시카고·런던·뉴욕 마라톤을 포함해 50여 차례 국내외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최고 기록은 2024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7분30초다. 현재 삼성서초사옥 마음건강클리닉에서 사내 임직원을 진료하고 있으며 대한 육상연맹 이사를 맡고 있다.

마음이 속상하고 힘들 때,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스스로 마음을 보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데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필자는 마라톤을 하면서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을 성찰하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스스로 내면을 풍요롭게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새벽마다 달리며 지친 이들의 마음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원동력을 얻고 있다. 20년간 달리기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통해 깨달은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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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ERIES/3322
김세희 |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임상교수·‘마음의 힘이 필요할 때 나는 달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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