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노래 ‘부용산’과 목포 항도공립여자중학교(상) [남도학교기행]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노래 <부용산>
#'부용산', 치유의 노래가 되다
먼저 떠난 이를 추모하는 행사장에서 위로를 경험한 경우가 있다. 공통으로 겪은 참혹함에 대한 집단 회상이 되려 힘이 경우가 있다. 슬픔과 고통의 시대에 대한 내면의 공감 때문일 것이다. 다수의 군중이 묵직하게 부르는 오월의 노래, 휘날리는 만장, 무대 위의 창작 퍼포먼스나 걸개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심사는 참 오묘한, 절규와 비탄 속에도 희열을 갈구하는, 그런 구석이 있다.
1949년 4월 11일 목포 평화극장 무대에서 처음 불러진 '부용산'은 이후 보성, 벌교, 순천, 구례 등으로 퍼져 남도의 산하에서 토벌대에 쫓기던 빨치산의 구전 노래가 되었다가, 비전향 양심수들이 감옥 창살에 기대어 읊조려지기도 했다가, 압제의 시대 저항을 일삼던 지식인, 학생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가슴을 적시기도 했다가, 1997년 가수 안치환의 앨범 <nostalgia>에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타는 목마름으로' 등과 함께 처음 수록되었다.

부용마을, 부용천, 부용산 등 부용(芙蓉)과 밀접한 지명은 전국 고을고을에 있다. 지형이 연꽃을 닮았다거나, 주변의 산세와 어울려 연꽃 모양을 이루었거나, 부용(浮蓉) 즉 물 위의 뜬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들이다.
수부용(水芙蓉), 목부용(木芙蓉)으로 나뉜다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용은 불교의 상징화인 연꽃, 즉 수부용일 터이다. 이제야 알았는데, 무궁화 모양으로 피는 목부용이 별개로 있다. 마을 지명을 제하고라도 산으로만 따져보자면,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882m),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209m),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203m), 경기도 양평군 양사면(366m), 충북 음성군 음성읍(645m), 충북 충주시 신니면(215m), 전남 장흥군 용산면~관산읍 일대(609m) 등에 같은 이름의 부용산이 있다. 대체로 낮은 산지여서 근린공원이거나 가벼운 등산 산책길로 활용되고 있다.

#세 여성의 생명을 앗아간 폐결핵
해방 이후 거의 동시대, 마치 무슨 억겁의 인연이 겹치기라도 한 듯, 피어나지 못한 채 시들었던 세 여성이 있다. 박영애, 안순자, 김정희가 그들이다.
박영애(1923~1947)는 국어교사이자 시인인 박기동의 여섯 살 아래 누이다. 요절한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겠지만, 어려서부터 심성이 곱고 얼굴도 예뻐 주변에서 천사 같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여수 돌산 둔전마을에서 태어났으나 1929년 한의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박준태를 따라 가족들이 보성 벌교로 이주하였다. 1941년 18세에 결혼하여 벌교 부용산 아래 민족음악가 채동선 생가가 있는 세망골(세망동)에서 신접살이를 시작하였으나,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지내다가 그만 폐결핵을 얻었다.
순천 도립병원에서 입원했을 때 박기동이 곁에서 보살피기도 하였으나 1947년 9월 6일 삶을 놓고 말았다. 나이 24세였다. 어머니 등 친정 가족들은 너무나 상심하여 참석하지도 못한 채 박기동 시인과 시집 식구 몇몇만 모인 가운데 쓸쓸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9월 8일, 막내 누이를 벌교 부용산 5부 능선에 묻고 돌아온 박기동은 그 애달픈 마음으로 '부용산'이란 시 초고를 썼다. 세상을 떠난 누이에게 느낀 삶의 허무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에 대한 무상을 노래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해 2월부터 순천사범학교 강사로 근무 중이었는데, 해방 직후 조직된 교원 단체인 '남조선교육자협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4월 순천경찰서에 약 4개월 동안 구금되었다가 함께 한 동료 교사 5인과 함께 정직('교협' 사건)되고 말았다. 정직이었지만 해직교사의 원조인 셈이다. 개인에 대한 사상적 탄압에다가 늘 안쓰러웠던 여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과 슬픔이 겹친 상황이었다.
안순자(1932~1947)는 작곡가 안성현의 여동생이다. 나주 남평 드들강(지석강)이 휘돌아 가는 현 남평초등학교 인근 동사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아직 어린 나이지만 부친이자 가야금 산조 명인이었던 안기옥(安基玉)을 따라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사하였다.
오빠 안성현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전남공립여중(현 전남여고), 광주사범학교, 조선대학교에 근무하면서 광주에 정착하게 되자 오빠와 함께 광주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가족 중 안성현과의 관계가 애틋했던지,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는지 유일하게 남도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보살핌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안순자 또한 너무나도 어린 15세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녀를 앗아간 것 역시 폐결핵이었다. 안성현은 여동생 뒷바라지를 잘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그리움이 컸을 것이다.
김정희(1931~1948)는 목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때문인지 성적은 늘상 최상이었고 예쁘고 조숙했다고 한다. 독서를 많이 하였으며 자작시가 문예지에 몇 차례 당선되었던 문학소녀였단다.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수재였던 터라 경성사범학교 합격하였다가 1948년 무렵 목포 항도공립여중 3학년에 전학하여 왔다.
동생 김창식은 당시 목포중학교(현 목포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같은 해 부임한 국어과 박기동 교사는 당시 문예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조희관 교장의 지원을 받으며 20쪽이 넘는 월간 문예지 『새싹』을 발행하면서 학생들의 창작활동을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주로 교사들과 학생들의 작품을 선정해서 싣는 방식이었는데, 학교 현장에서 발행한 최초의 문예지였다고 한다.
타고난 문학적 감수성에다 박기동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전국 학생 백일장대회에서 '감화원 설계도'라는 주제로 장원을 했다. 일제가 1938년부터 운영하던 고하도 감화원 수용자들의 비극적인 생활상을 지적하면서 개선책을 제시한 그 글은 수상 이후 목포 지식인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고 한다. 문학의 서정성을 넘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개선을 촉구한 냉철한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가 된 부용산
김정희가 사망으로 인해 학적에서 제적 처리된 기준일은 1948년 10월 10일이다. 그녀의 죽음은 학교는 물론 지역사회를 실의에 빠트렸다. 목포공립상업중학교(목포상고) 밴드부가 앞서서 장례 참가자들을 인도하였으며, 학생들과 많은 시민들이 행렬에 참여하면서 마치 시민장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제자 김정희의 죽음을 맞이한 음악교사 안성현은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었던 국어교사 박기동의 시 '부용산' 초고에 곡을 붙였다. 비록 세 살 차이지만 같은 또래이기도 하거니와 같은 해에 동시에 누이를 잃은 동질의 경험은 두 사람의 소통 매개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박기동 작시 '부용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뒷날 박기동은 '부용산'의 "피어나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구절은 원래의 시에서는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하였다. 안성현이 음악실에서 곡을 붙이면서 두 구절 정도 수정 제안을 했는데, "붉은 장미"를 "병든 장미"로, 마지막 구절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소리를 떠올리도록 운율을 넣자는 의견도 내었다고 했다.
따라서 박기동의 원래 작시와 악보에 기재된 가사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작 박기동의 시에 작곡가 안상현이 더한 음악성, 게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목도한 제자 김정희의 죽음까지, 세 가지 슬픔이 더해져 '부용산'은 탄생하였다.
안상현이 최종 완성한 현재의 악보 원본이 드러나게 된 것은 영암 출신으로서 박기동의 제자 김효자(金孝子, 1932~2022) 덕분이다. 김정희와 같은 문학소녀로서 동급생 임성순(시인이자 화가)과 더불어 셋이서 단짝 친구 사이였기에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임성순과 김효자는 학창 시절의 사진 등 상당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서 사실 확인에 보탬이 되었다. 김
효자가 경기대학교 일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98년 노래 악보 원본을 제보한 것은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김효자 교수가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적한 이는 목포 출신 연극인 김성옥(전 환경부장관 손숙의 남편)이다.

#'부용산' 첫 주자 배금순
박기동의 시에 안성현이 곡을 붙인 '부용산'은 이후 두 사람의 기구한 인생처럼 곡절이 많았다. '부용산'은 1949년 4월 11일 목포 평화극장에서 열린 예술제 무대에서 5학년 학생 배금순(裵錦順, 1회)에 의해 처음 불러졌다. 예술제는 가사실 조성 기금 마련을 위한 일종의 후원 행사였다.
당시 목포 항도공립여자중학교는 호남동 1-10에 자리한 신축 교사로 현재 목포YWCA 인근 삼각형 모양의 주차장 자리(영산로 137)에 있었다. 평화극장은 학교를 출발하여 목포역을 지나 약 750m 떨어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현재는 목포시 청소년문화센터 옆 청소년문화공원 자리이다.
본래 희락관이라는 영화관이 있었으나 1926년 화재로 전소되면서, 1927년 목조건물로 재건되어 평화관, 후에 평화극장으로 개칭한 목포의 대표적인 문화 예술 공연 장소였다. 1937년 월북 무용수 최승희가 이곳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1950년 무렵 최승희의 딸이었던 17세였던 안성희도 이곳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최승희와 인연이 었었던 안성현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화극장은 1980년까지 운영되었다.
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 행사였기에 다수의 학부모 및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이 자리 예술제에서 5학년 배금순 학생에 의해 노래로 불러지면서 예술제에 참석한 학부모, 시민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8년 가을에 창작되면서 노래집이 제작되었기에 교내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노래였을 수도 있다. 1949년 이후 목포는 물론 보성, 벌교, 순천, 구례, 여수 등지로 퍼져 여순항쟁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지리산과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산사람, 빨치산들의 애창곡으로 퍼지게 되었다.
공식적인 '부용산'의 첫 주자인 배금순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안성현으로부터 성악 지도를 받고 있었던 4학년 배금순은 1948년 전국대회에서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산유화'를 불러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다.

산유화를 작곡한 김순남은 1948년 월북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초창기 현대음악가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작곡가였다. 남쪽에 남겨진 유일한 혈육이자 딸이 '김세원의 영화음악실'을 비롯하여 수많은 프로그램과 내레이션을 맡은 성우 김세원이다.
1920년생인 안성현은 김순남과 연배도 가깝고 음악적 성향도 비슷하여 자연스럽게 신곡 '산유화'를 제자 배금순에게 소개하면서 훈련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배금순은 1949년 5월 8일 개최된 '호남콩클대회'에서 중등부 1위 입상을 하기도 하였으나 9월 이후 지도교사 안성현이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신예 무용수 안성희(安聖姬, 1932~?)의 공연이 평화극장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북한 인민군의 진입에 맞추어 예술동맹 단원들의 위문 공연 성격이었다. 이 과정에서 안성희는 목포 출신 춤꾼 이매방(1926~2015) 등에게 북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안성희는 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승희와 문학평론가 안막(安漠) 사이에 태어난 딸로서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은 촉망받는 무용수였다. 시기를 단정할 수 없지만, 일본 유학 시절 최승희와 교류했던 안성현도 이러저러한 북쪽의 소식을 전해 들었으리라 믿는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안성현이 월북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북쪽에는 가야금 산조 명인 아버지 안기옥과 가족들, 그리고 김순남, 최승희를 비롯한 예술인들이 있었다.
동시에 그 야무진 표정의 배금순 또한 이후로는 활약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1949년 5학년 수료 기념사진 외 1950년 5월 5일 졸업한 제1회 졸업생 명단에서는 배금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