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로 남은 사람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 부품 글로벌 1위는 누구?
자동차 한 대를 완전히 분해해 보면 수천가지 부품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엔진 제어 장치, 연료 시스템, 브레이크, 센서, 전장 부품까지. 수많은 부품들 중 하나라도 없다면 자동차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같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기업 중 세계 1위 기업은 바로 보쉬다. 완성차 회사들이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에, 그 경쟁의 기반이 되는 기술의 상당 부분은 이 곳 보쉬에서 만들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차를 만드는 회사는 많지만, 차가 움직이게 만드는 회사는 하나다.” 그 회사가 바로 보쉬다.
보쉬 로고가 적힌 차량
위기 맞은 보쉬, 위기에 강한 보쉬
그리고 지금, 그 보이지 않는 거대 기업이 또 한 번 산업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다. 보쉬는 최근 지난해 실적을 발표하며 어려운 경영환경을 짚었다. 2025년 매출은 910억 유로로 소폭 늘었지만, 영업이익률은 3.5%에서 1.9%로 급락했다. 글로벌 관세 확대와 가격 경쟁 심화, 반도체 공급 불안까지 겹치면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회사는 이미 전체 인력의 약 3%에 해당하는 1만3000명 감원 계획도 내놓았다.
로베르트 보쉬
스테판 하르퉁 CEO는 “자동차 산업은 앞으로도 한 푼 한 푼을 놓고 경쟁하는 산업이 될 것이다”고 밝혔다.
자동차 산업이 흔들릴 때 자동차 부품업체도 영향을 받는다. 보쉬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회사는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사업을 넓힌다. 자동차 경기에만 의존하지 않기 위해 산업기술, 공구, 에너지, 스마트빌딩, 소프트웨어까지 영역을 확장해왔다. 그리고 그 시작엔 위대한 창업자 로베르트 보쉬가 있었다.
기술 전환의 중심에 선 독일서 태어난 11번째 아이
1861년 9월 23일, 독일 남부의 작은 마을 알벡. 여관과 농장을 함께 운영하던 집안에서 열한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로베르트 보쉬였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는 분명한 원칙을 가르쳤다. 기술을 배우고, 스스로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로베르트 보쉬(왼쪽)
그가 태어난 시기의 독일은 거대한 전환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직 통일도 이루어지기 전이었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철도가 빠르게 깔리고, 증기기관과 기계공장이 농업 중심의 지역 경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통일된 이후에는 국가 차원의 산업 육성이 본격화됐고, 철강·기계·화학·전기 산업이 급속히 성장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노동력이 이동했고, 장인과 농민의 세계는 점차 공장과 기술자의 세계로 바뀌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 사회에서는 하나의 인식이 자리 잡았다. 토지나 가문이 아니라 기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계와 전기 분야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이었고, 숙련 기술자는 안정적인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기술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계층 이동의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계층을 바꾸는 유일한 힘 ‘기술’에 눈뜨다
때문에 어린 보쉬가 선택한 길은 바로 기술이었다. 그는 울름에서 정밀기계 도제 과정을 시작했다. 울름은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지만, 당시로서는 산업화의 기운이 빠르게 스며들고 있는 곳이었다. 도나우강을 따라 형성된 이 도시는 중세부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전통적인 장인 도시로 19세기 들어서는 철도 개통과 함께 남부 독일의 물류와 제조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대규모 공장이 들어선 산업도시는 아니었지만, 정밀기계·금속가공·공구 제작 같은 기술 기반 수공업이 활발해 숙련 기술자를 양성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젊은시절 보쉬
그는 낮에는 금속을 깎고 부품을 조립했으며, 밤에는 도면을 그리고 계산을 했다. 당시 독일의 도제 제도는 단순한 기능 교육이 아니라 산업 인력을 체계적으로 길러내는 국가적 기반이었다. 그는 손으로 일하는 기술자였지만, 동시에 기계가 만들어낼 새로운 산업의 흐름을 이해하려 했다. 그에게 기술은 직업이 아니라, 시대의 방향을 읽는 도구였다.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선 보쉬, 에디슨을 만나다
그러나 그는 한 도시의 기술자로 머물 생각이 없었다. 독일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경험했고,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해외로 떠났다. 1884년, 그는 뉴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일하게 된 회사의 주인은 토머스 에디슨이었다. 에디슨의 조직은 개인 발명가의 작업실이 아니라 연구, 생산, 사업이 동시에 돌아가는 산업 시스템이었다. 보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발명은 개인의 능력이지만, 산업은 조직과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
이후 그는 런던으로 건너가 지멘스 브라더스에서 근무했다. 이미 유럽을 넘어 전세계 네트워크로 움직이던 기업이었다. 전기와 통신이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확신을 남겼다. 좋은 기술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세계 시장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작은 공방을 세운 보쉬, 신뢰를 만들다
1886년 11월, 그는 독일로 돌아와 슈투트가르트에 작은 공방을 열었다. 간판에는 정밀기계 및 전기공학 공방(Workshop for Precision Mechanics and Electrical Engineering), 독일어로는 ‘Werkstatte fur Feinmechanik und Elektrotechnik’이라는 긴 이름이 붙었다. 직원은 두 명. 주문은 거의 없었다. 아니 주문이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이 시간을 버티게 해준 사람은 그의 아내 안나였다. 생활비를 아끼고 가계를 지키며 회사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보쉬는 훗날 회사를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함께 버텨준 가족이었다고 말했다.
보쉬 로고
그는 창업과 동시에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신뢰를 잃느니 돈을 잃는 편이 낫다.”
보쉬는 불량품은 출하하지 않는다. 고객의 신뢰가 흔들릴 바에야 손해를 감수하고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독일은 가격 경쟁과 대량 생산이 산업의 기준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속도 대신 신뢰를 선택했다. 이 원칙은 이후 140년 동안 이어온 보쉬의 정체성이 됐다.
보쉬를 찾아온 귀인, 자동차 산업의 혁명
그리고 그에게 인생을 바꿀 한 귀인이 찾아왔다. 1887년, 한 남자가 공방을 찾았다. 그의 이름은 고틀리프 다임러. 그는 가솔린 엔진을 개발하며 ‘자동차’라는 새로운 기계장치를 발명한 이였다. 그러나 그가 만든 자동차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자동차의 심장이라 불리는 엔진의 점화상태가 불안정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시동이 걸리지 않거나, 주행 중 엔진이 멈추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다임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은 이가 바로 보쉬였다.
고틀리프 다임러
보쉬는 이미 정밀기계와 전기 장치 수리·제작 분야에서 ‘정확하고 고장이 적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문제 해결 능력과 품질에 대한 집요함으로 지역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다임러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부품이 아니라, 엔진의 신뢰성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술자였다.
보쉬의 점화 플러그
또한 남독일 제조업 중심지였던 슈투트가르트 지역에 이러한 기술 기업들이 몰려있었다는 점도 기회로 작용했다. 당시 다임러의 연구소는 슈투트가르트 인근 칸슈타트에 있었다. 이 지역은 정밀기계와 금속가공 공방들이 모여 있던 남독일 제조업 중심지였다. 필요한 부품이나 기술이 있으면 대기업이 아니라 근처의 전문 공방을 직접 찾아 협업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자동차 산업이 아직 초기 단계였던 만큼, 모든 기술을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만남은 이후 독일 자동차 산업의 구조를 상징하는 관계로 이어진다. 슈투트가르트에 본사를 둔 다임러는 훗날 메르세데스-벤츠로 이어졌고, 보쉬와의 협력은, 이후 100년 넘게 이어지는 독일 자동차 산업의 협력 생태계 출발점이 됐다. 현재도 메르세데스-벤츠 본사는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해 있다.
엔진점화장치서 시작한 보쉬, 공장을 세우다
보쉬는 저전압 마그네토 점화시스템을 개발해 다임러에 납품하기 시작했고 이후 기술을 발전시켜 1902년 고전압 마그네토와 스파크 플러그 시스템을 완성했다. 강한 전기 스파크가 고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점화를 유지했다. 당시 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는 시동 불량과 잦은 고장이었다. 보쉬는 자동차의 가장 불안한 부분을 해결한 셈이다.
보쉬의 생산공장
다임러와 벤츠를 비롯한 주요 제조사들이 이 기술을 채택했고 주문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작은 공방은 공장으로 바뀌었다. 이때 보쉬는 회사의 방향을 분명히 정했다.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자동차가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을 만드는 회사가 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 선택은 훗날 보쉬를 세계 1위 자동차 부품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1910년대, 이미 보쉬의 매출 대부분은 해외에서 발생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생산과 판매 거점을 구축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1927년에는 디젤 연료 분사 시스템을 개발하며 상용차와 산업용 엔진 시장까지 발을 넓혔다.
사람의 목숨을 구한 ABS의 발명
이후 보쉬는 다시 한번 자동차 안전에서 위대한 발명에 나선다. 자동차 기술 발전으로 속도가 빨라지고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브레이크를 강하게 밟으면 바퀴가 잠기고, 차량이 미끄러지면서 오히려 제어가 불가능해지는 현상이었다. 자동차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이제는 멈추는 기술이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보쉬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한다. 바퀴 잠김을 방지하는 기술, 즉 ABS(Anti-lock Braking System) 기술이 그 주인공이다. 사실 ABS 기술의 아이디어 자체는 보쉬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항공기용 제동 기술에서 출발해 영국의 던롭이 초기 자동차용 기계식 ABS를 개발하며 개념을 상용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기술은 구조가 복잡하고 반응 속도가 느려, 실제 도로 환경에서는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웠다. 비용과 신뢰성 문제로 대량 적용에도 한계가 있었다.
초창기 보쉬의 ABS
결국 ABS 기술을 자동차 산업의 표준으로 만든 것은 보쉬였다. 보쉬는 기계식 방식 대신 전자제어 기술을 도입했다. 바퀴의 회전 속도를 센서로 실시간 감지하고, 제동 압력을 초당 여러 차례 자동으로 조절하는 전자식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리고 1978년,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에 적용하며 세계 최초로 전자식 ABS 양산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급제동 상황에서도 조향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후 전 세계 자동차의 기본 안전 장치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ABS는 선택 사양이 아니라 자동차 안전의 최소 기준이 됐다.
성능과 안전을 잡은 보쉬, 차부품업계의 명성을 얻다
보쉬는 1902년, 고전압 마그네토 점화장치를 통해 엔진을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만들며 자동차 산업의 출발 단계의 신뢰성 문제를 해결했고 1978년, 전자식 ABS를 통해 고속 주행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안전 문제를 해결했다.
자동차가 움직이게 만드는 기술과, 자동차를 안전하게 멈추게 만드는 기술. 보쉬는 자동차 산업의 시작과 성장 과정에서, 성능과 안전이라는 두 축을 모두 완성한 기술 기업이었다.
보쉬의 탄생을 기념하는 메시지
1980년대 이후 자동차는 기계에서 전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엔진 제어, 배출가스 관리, 변속, 주행 안정성까지 센서와 컴퓨터가 담당하게 됐다. 보쉬는 전자제어장치와 센서를 통합하며 차량 내부의 보이지 않는 시스템 공급자가 됐다. 오늘날 자동차 한 대에는 수십 개의 보쉬 기술이 들어간다. 브랜드는 완성차가 가져가지만, 성능과 안전의 상당 부분은 이 회사가 맡는다.
파란색과 초록색, 세계 최초의 해머드릴
보쉬의 사업은 자동차에만 머물지 않았다. 1920년대 후반 전기 모터 기술을 활용해 전동공구 사업을 시작했고, 1932년 세계 최초의 전기 해머드릴을 출시했다. 이후 건설과 산업 현장에서 필수 장비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에는 가정용 시장까지 확대했고, 전문가용과 가정용을 색상으로 구분하는 전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보쉬 공구세트
이 사업은 자동차 시장과 분리된 안정적인 수익 기반이 됐고 보쉬를 자동차 부품 회사가 아니라 종합 산업기술 기업으로 만들었다.
로베르트 보쉬는 194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회사의 미래까지 설계해 두었다. 지분 대부분을 재단 구조로 전환해 이익이 연구와 사회, 교육에 사용되도록 했다. 덕분에 보쉬는 상장하지 않은 상태로도 장기 기술 투자 중심의 경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자동차 산업은 경기 변동이 크고 기술 투자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장사였다면 실적 압박이 경영 방향을 흔들었을 것이다.
하루 8시간 근무를 도입한 혁신경영가, 보쉬
보쉬의 또다른 유명한 일화는 바로 일일 8시간 근무제의 도입이다. 1906년, 로베르트 보쉬는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줄였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은 하루 10시간에서 12시간 노동이 일반적이던 시기였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 장시간 노동은 산업화 초기 공장의 기본 조건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쉬의 판단은 달랐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피로한 노동자가 만든 제품은 결국 품질 문제로 이어지고, 품질이 흔들리면 고객의 신뢰도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노동시간 단축은 복지 정책이 아니라, 품질과 신뢰를 지키기 위한 경영 전략이었다.
로베르트 보쉬
이 결정은 이후 산업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사례와 연결된다. 1914년 미국의 헨리 포드는 하루 8시간 근무제와 함께 임금을 두 배로 올리는 파격적인 정책을 시행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대량생산 체제의 효율을 높이고 노동자를 소비자로 만들겠다는 전략으로, 포드의 개혁은 산업 경영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시간만 놓고 보면, 8시간 노동제를 먼저 도입한 기업은 포드가 아니라 보쉬였다.
포드보다 8년 앞선 결정이었다. 결과는 보쉬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량률은 눈에 띄게 줄었고, 숙련 기술자의 이탈도 감소했다. 작업 효율은 오히려 개선됐고, 생산량 역시 큰 폭으로 줄지 않았다. 노동시간 단축은 비용이 아니라 경쟁력이 되었다. 이 일화는 그가 단순한 기술 경영자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지속적으로 신뢰를 만들어가는 공동체 리더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래서 보쉬는 기술 혁신 기업이면서 동시에 노동과 사회적 책임을 중시한 기업가로도 자주 언급된다.
신뢰로 위기돌파 나설 보쉬의 미래
현재 보쉬의 매출은 약 900억 유로, 직원은 40만 명 수준이다. 자동차 부품 매출 기준 세계 1위이며, 사업의 약 60%가 모빌리티 분야에서 나온다. 폭스바겐과 BMW, 메르세데스가 자동차를 만든다면, 그 자동차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기술의 상당 부분은 보쉬가 공급한다. 보쉬는 거대한 기업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조용한 기업이다. 완성차 회사는 시대에 따라 흥망이 바뀐다. 산업 구조도 계속 변한다. 그러나 산업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술은 바뀌고 산업 구조는 흔들려도, 이 회사는 위기가 올 때마다 가장 먼저 구조를 바꾸고 가장 오래 버텨왔다. 그리고 지금도 자동차 산업이 전동화 전환 지연과 가격 경쟁, 관세 부담 속에서 흔들리는 가운데, 보쉬 역시 수익성 악화와 구조조정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이 회사의 역사를 돌아보면, 위기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내연기관의 등장, 두 차례 세계대전, 글로벌 경기 침체, 전자화 전환, 디지털 혁명까지. 산업의 큰 전환기마다 보쉬는 항상 압박을 받았고, 그때마다 사업 구조를 바꾸며 살아남았다.
140년 동안 그래왔듯이, 이 회사는 위기 속에서 기술을 바꾸고, 사업을 바꾸고, 구조를 바꿀 것이다.
다만 단 한가지만은 지켜나갈 것이다. 신뢰를 잃느니 돈을 잃는 편이 낫다는 로베르토 보쉬의 원칙이다.
보쉬 본사
[흥부전]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