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작업장인가 쓰레기장인가”…거장 프란시스 베이컨의 방 찾았다가 놀란 이유 [슬기로운 미술여행]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6. 2. 2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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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미술여행- 56] 아일랜드 현대미술관

지난해 8월 첫 주, 저는 아일랜드로 유럽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떠났습니다. 짧은 더블린행 여정에서는 오스카 와일드, 사무엘 베케트, 브람 스토커 등 대문호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죠.

더블린의 자랑이자 최고의 관광지는 놀랍게도 기네스 스토어하우스였습니다. 8층 높이의 박물관과 시음을 할 수 있는 바가 있고, 여기에 8층 바의 전경은 더블린 최고의 뷰포인트더군요. 오리지널 기네스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학생들. 종탑 아래를 지나면 불운하다는 미신 때문에 학생들은 꼭 돌아 다닌다고 한다. ©김슬기
트리니티 대학에서 일어난 일
더블린의 랜드마크인 120미터 높이의 스파이어. ©김슬기
오늘의 여행은 좀 한적한 곳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아일랜드를 한국과 같은 아픔을 가진 나라로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낍니다. 영국의 기나긴 지배를 받았던 역사 때문이겠죠. 덕분에 이 도시에는 매우 독특한 랜드마크가 있었습니다. 고층빌딩 하나 없는 이 평평하고 소박한 도시에 120미터 높이의 바늘 모양 탑이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더블린 오코넬 거리에 있는 120m 높이의 첨탑 스파이어입니다. 영국인 건축가 이안 리치가 설계한 이 뾰족한 은빛 첨탑은 1966년, 영국의 영웅 넬슨 기념비를 폭파한 자리 위에 2003년 세워졌죠. 아일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이 영국을 앞지른 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은 이 곳에서 인증사진을 찍곤 합니다.

이 곳에서 남쪽으로 걸어 리피강을 건너면 도심 한복판에 캠퍼스가 등장합니다.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정치인과 유명인을 비롯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문호들을 죄다 배출한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 Dublin)이죠. 관광지가 많지 않은 더블린의 관광 1번지인 곳입니다. 이날도 역시나 시민에게 개방된 이 대학에 아무 계획없이 들어섰다가, 마침 재학생의 캠퍼스 투어 행렬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트리니티 대학은 켈스의 서가 아주 유명한데요. 9세기경 제작된 가장 유명한 채색 필사본 중 하나입니다. 라틴어 4복음서를 정교한 채색화로 그린 680쪽 분량의 이 책은 아일랜드의 보물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더블린 올드 라이브러리에 소장되어 있는데요. 긴 줄을 서서 입장해야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20만 권의 고서가 보관된 서재 롱 룸(Long Room)도 사진 명소로 유명한데, 서가가 텅텅 빈 곳이 많은 도서관 서고는 기대만큼 멋지진 않았습니다.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롱드 라이브러리의 롱룸
뜬금없이 대학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 있습니다. 저의 새 책에 관한 약간의 ‘트리비아’를 들려주고 싶어서입니다. 에필로그까지 읽으신 분들이 있으신지? 저는 1년의 여행을 마무리하는 더블린 여행을 앞두고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을 드라마로 정주행했습니다. 여러번 읽은 소설을 시각적으로 체화시키고 여행을 떠난 셈이죠. BBC 드라마는 사실 책보다도 더 섬세하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명작입니다.

이날 만난 법대 4학년생 가이드는 학교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나오는 두 고풍스러운 건물 중 왼쪽 건물을 ‘천국’, 오른쪽 건물을 ‘지옥’에 비유했습니다. 왼쪽 건물은 졸업생들이 결혼과 졸업식을 하는 곳이고, 오른쪽 건물은 장학금 시험을 보는 곳이어서입니다. 이 곳 학생들은 1학년을 마치면 하루 종일 시간이 걸리는 장학금 시험을 치릅니다. 각 단과대별로 1명이 뽑힐까 말까하는 합격률 5% 미만의 극한 시험입니다. 합격자에게는 막대한 특전이 지급됩니다. 학사와 석사를 합친 5년 전액 장학금에 식비+일정한 생활비까지 지급이 되는거죠.

이 시험 합격생으로 가장 유명한 이가 오스카 와일드구요. <왕좌의 게임>의 치가 떨릴 정도의 악한인 조프리 바라테온을 연기한 잭 글리슨도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시험에 합격한 ‘흙수저’ 코넬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됐죠. 가난 때문에 소울메이트 메리앤과 헤어졌던 코넬은 지갑 사정이 나아지면서 마침내 ‘그랜드투어’를 떠납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회화의 예술>을 몇시간이나 멍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하고 그의 삶은 다른 궤도를 향하기 시작했죠.

잔디밭에 누워 망중한을 보내는 학생 중에서도, 트리니티 학생들의 최애 카페 브레드41에 어렵게 자리를 잡았을 때도 학생들이 샐리 루니를 읽는 모습을 몇번이나 만났습니다. 가이드를 해준 학생은 “올해 미국에서 트리니티 대학으로 온 유학생의 숫자가 3000% 늘었다”고 하더군요. 놀라운 문학의 힘입니다. (물론 드라마의 힘이 더 크겠지만요)

이날 늦게까지 더블린의 펍과 버스킹까지 구경하며 정도 많고 흥도 많은 아일랜드인의 진면목을 본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브람 스토커와 사무엘 베켓에 관한 무용담도 들을 수 있었고, 펍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와 제임스 조이스의 흔적도 곳곳에서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가 많은 <이토록 사소한 것들>의 클레어 키건의 책도 서점과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었죠. 트리니티 대학 주변 서점마다 자랑스러운 SBN(선배님)들의 책은 잔뜩 진열되어 있더군요. 더블린은 분명 작은 도시였지만, 문학팬에게는 정말 즐거운 여행지였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혼돈의 작업실
아일랜드 현대미술관이 된 옛 병원 건물 ©김슬기
내부 전시 전경 ©IMMA
더블린에서 가장 먼저 찾은 미술관은 아일랜드 현대미술관(IMMA)이었습니다. 17세기 옛 군 병원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4500점 이상의 현대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입니다. 중정을 둘러싼 정방형의 미술관 건물은 크지는 않았지만, 야외의 스크리닝 시설과 잘 가꿔진 정원 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21세기 작가를 중심으로 소장하며 매년 중요한 동시대 작품들을 늘려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과 비교하면 작은 크기였고, 1시간 남짓이면 둘러볼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내부 전시는 아일랜드 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3년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100명이 넘는 작가들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고 있더군요.

루치안 프로이드와 같은 익숙한 작가부터 아츠시 카가와 같은 신예까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습니다. 젠더, 혼종성, 문화사, 탈식민주의, 디아스포라, 이주, 기후 및 생태 변화와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기억과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최근 미술사적 흐름도 조명합니다. 브라이언 오도허티의 갤러리 비판에서 영감을 받아 특별히 제작된 ‘화이트 큐브’ 갤러리 공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전후 미국 여성 작가들, 마르셀 뒤샹, 안드레아 가이어, 대프니 라이트와 앨리스 마허의 주요 설치 작품도 있었죠.

아츠시 카가 [우키요에], 2024 ©김슬기
샘 길리엄 개인전 ©김슬기
정원 옆에는 문지기가 살았을 것 같은 작은 집도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샘 길리엄(Sam Gilliam, 1933–2022)의 개인전 ‘Sewing Fields’가 열리고 있었는데요.

길리엄은 회화의 언어를 확장시킨 미국 추상미술작가입니다. 1960년대 ‘드레이프 페인팅(draped paintings)’으로 가장 잘 알려진 그는, 액자의 틀(프레임)에서 벗어나 색채를 3차원 공간으로 끌어들였죠. 여기서 등장하는 재료가 천입니다.

이번 전시는 길리엄의 후기 경력 중 중요한 시기였던 1993년, 메요 카운티의 발링글렌 예술 재단(Ballinglen Arts Foundation) 레지던시 시절에 초점을 맞춥니다. 평소의 스튜디오 환경을 이용할 수 없었던 그는 새로운 접근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바로 워싱턴 D.C.에서 천을 염색한 뒤, 아일랜드에서 이를 자르고 꿰매어(sewing) 층층이 쌓인 구성으로 만드는 것이었죠.

이 작업은 전환점이 되었고, 그가 이후 30년 동안 천착한 작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해에 길리엄은 세 점의 그림에 각각 <아이리시(Irish)>, <메이요 카운티(County Mayo)>, <다운패트릭 헤드(Downpatrick Head)>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아일랜드가 그의 예술적 상상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줍니다.

휴 레인 갤러리 ©김슬기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업실 ©김슬기
프란시스 베이컨의 미완성 페인팅©김슬기
더블린의 숙소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미술관도 있었습니다. 휴 레인 갤러리는 더블린 시내 중심부 파넬 광장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더블린에서 태어난 슈퍼 스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죠. 이 미술관은 20세기 초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선구적인 켈트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1908년 휴 레인 경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전설적인 작업실은 1998년 런던 리스 뮤즈 7번지에서 더블린으로 옮겨져 현재 원래 모습 그대로 영구 전시 중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어지럽혀진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더군요. 미술관이 소장한 베이컨의 매혹적인 미완성 작품 6점도 나란히 전시됩니다.

스테인드글라스 해리 클라크 [성 아그네스 이브], 1924 ©김슬기
소장품 전시에서는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모리소의 인상파 회화와 아그네스 마틴, 니키 드 생팔, 요셉 보이스, 귄터 위커 등의 작품이 소장되어 전시 중이었습니다. WB 예이츠를 비롯한 유명 아일랜드 인물들의 초상화도 만날 수 있었고요. 예이츠와 함께 애비 극장을 설립한 오거스타 레이디 그레고리와 정치 지도자 마이클 콜린스 등이 주인공이있습니다.

41세에 요절한 아일랜드 예술 및 공예 운동의 선구자 해리 클라크의 <성 아그네스의 전야>와 <길훌리 씨>가 있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방도 있었는데요. 130개 이상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한 이 예술가의 대표작은 아일랜드에서 본 가장 이색적인 예술작품이기도 했습니다. 푸르스름한 유리에 새겨진 옛 신화 속 이야기는 어두운 방 안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1년 동안 쉬지 않고 배달해온 ‘슬기로운 미술여행’이 ‘오늘도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종이책으로 지난 이야기들을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꼭 만나보시길! 유럽 최고 미술관들의 이모저모를 속속들이 담았으니, 아마도 유럽 여행을 앞둔 분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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