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에게 재판 방청할 시간을 허하라

이슬기 프리랜서 기자 2026. 2. 2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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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미다시 (미디어 다시 읽기)]

[미디어오늘 이슬기 프리랜서 기자]

▲ 한 사람이 두 손으로 노트북 키보드를 누르고 있는 모습. 사진=GettyImages Bank

며칠 전 인스타그램 계정에 '쓰고 싶지만 잘 모르는 주제', '쓰기 싫지만 핫한 주제'를 두고 투표에 부쳤다. 결과는 81% VS 19%, 전자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후자를 택한 몇 안 되는 이들 가운데서는 유독 언론인들이 많은 게 눈에 띄었다. 쓰고 싶지만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서는 글쓰는 이의 호기심이 곧 원천이 되어 오랜 시간을 들여 많은 품을 들일 수 있다. 그러나 '쓰기 싫지만 핫한 주제'는 그럴 여력이나 의욕도 없을뿐더러 매일 아침 꾸역꾸역 발제를 해야만 하는 기자들의 몫일테다. 직업인 누구나가 자신의 호흡만으로 살 수는 없지만, 기자는 더욱 그러기가 어렵다. 이슈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여기,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자주 '재판 방청 중'인 기자가 있다. 오세진 한겨레21 기자다. 보통의 직장인은 '프사'로 '휴가'라는 문구를 많이 띄우며, 법원 출입기자들도 생각보다 재판을 잘 챙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나는 일간지 사건팀 기자 시절, 지방법원을 출입처로 두고 있으면서도 2년 동안 재판 방청을 한 번 밖에 하지 못했다. 오 기자는 그렇게 12·3 내란에 가담한 군인들의 재판 기록기 '법정에서 규명하는 12·3 내란'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26일, 36주차 임신중지 수술로 태아 살인 혐의를 받는 산모 A씨와 의료진, 브로커에게 내려진 검찰 구형 소식이 일제히 기사화됐다. 2024년 6월 A씨가 '36주차 임신중지 브이로그'를 유튜브에 올렸다가 '논란'에 휩싸이자, 보건복지부는 A씨를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검찰은 A씨에 징역 6년을, 병원장과 수술 담당 집도의에게는 각각 징역 10년과 6년을 구형했다. 기사는 대부분 구형 결과와 이유, A씨와 관련자들의 최후 진술, A씨를 둘러싼 '브이로그 논란'을 짧게 다루는 스트레이트 형식으로 쓰였다.

반면 오 기자의 기사는 달랐다. 그는 <임신중지권 방치한 국가, 여성에게만 “엄벌” 요구>(2월10일) 제목의 기사에서 A씨가 겪은 재판 과정을 상세히 그렸다. 기사는 '임신중지는 살인'이라는 함의가 담긴 남성 공판검사의 유도심문, “시술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검색 안했느냐”는 부장판사의 질문과 “살아서 나온다고 했으면 병원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A씨 답변 등을 시민단체의 멘트와 여러 문헌들을 통해 재해석한다. 이는 곧 '낙태죄 폐지 7년'을 넘기고서도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방기했던 국가가 얼마나 여성에게만 집요하게 '책임'을 묻는지, 임신중지를 결정하기까지 여성이 처한 환경과 심리는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 2019년 4월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판 분위기를 길게 전한 이유에 대해 오 기자는 내게 “해당 여성이 살인죄로 기소가 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며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안전한 임신중지가 불가능한 현실 속 개인을 범죄자로 내모는 분위기에 짓눌린 여성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 기자의 기사 외 해당 재판의 워딩과 분위기를 자세히 보여준 기사는 정다운·나채영 노컷뉴스 기자의 '[법정B컷] 여전히 '예비 살인자'인 여성… '36주 낙태' 재판이 던진 질문' 뿐이었다.

물론 출입처가 따로 없는 주간지 소속인 오 기자의 기사와, 출입처 이슈를 챙기며 매일 마감을 하는 일간지 기자의 기사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속보 다툼을 해야 하는 일간지와 달리 주간지는 이슈를 해설하고 맥락을 전하는 데 특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간지의 법원 출입 기자들에게도 공판은 곧 '챙겨야 할 현장'이다. 일간지 소속 법원 출입기자 B는 “현장을 계속 가서 봐야 기획이나 분석 기사도 쓸 수 있고, 나중에 선고 기사를 쓸 때도 풍부한 함의를 담을 수 있는데 이를 알고 재판에 들어갈 시간을 주는 데스크는 드물다”고 털어놨다. 경제매체의 법원 출입기자 C는 “풀 기자단 일원이라 관심 없는 재판에도 들어가서 속기를 쳐야 하지만, 정작 관심 있는 재판에는 들어갈 시간이 없다”고 토로했다.

결과적으론 '윤석열 내란죄 1심 무기징역 선고' 같은 사상 초유의 이슈에서도 이전부터 재판을 잘 챙겨서 주요 쟁점과 흐름을 꿰고 있는 기자와 그렇지 않은 기자가 쓰는 기사의 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결과값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스트 기사'에만 힘을 쏟기보다, 뉴미디어 시대에 '다른 기사'를 쓸 수 있는 틈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자가 여러 재판을 방청하며 모두가 아는 이슈 추적을 넘어 이슈를 '발굴'할 기회도 줘야 한다. 특히나 A씨 기사처럼, 맥락이 중요한 젠더 이슈는 더욱 그렇다.

이니셜 범벅인 '윤석열 1심 판결문'을 두고,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오는 것처럼 '와치독(watchdog)'이라는 언론의 감시·견제 기능을 위해서도 기자들에는 공판을 챙길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현장이 생명'인 취재의 본령에 부합하는 길이며, '다른 기사'를 쓰는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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