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사려는 남자들의 긴 줄…지루했던 사내들은 서로 탱고를 췄다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6. 2. 2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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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묵직할수록 중력이 셌다. 졸지에 부가 쏟아진 도시엔 한몫 챙겨보려는 남자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항구에는 매일같이 사내들이 몰려들어서, 도시에 여자라고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극단적 남초사회였다.

몸이 달아오른 남자들은, 머리가 긴 사람이다 싶으면, 헤벌쭉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바람에 실려 오는 비누 향에 배꼽 아래가 간지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약삭빠른 인간들은 여자를 팔아 큰돈을 챙길 궁리를 했는데, 이 더러운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매춘 업소를 열자마자 남자들로 법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포주들은 제 차례를 기다리는 사내들을 달래야 했다. 악사에게 악기를 켜게 했는데, 손님들은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탱고’의 시작. 돈이 넘쳐흘러서, 돈 냄새를 맡고 찾아온 수많은 이민자들로 복대겼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이곳의 경제사는 탱고만큼이나 강렬하고, 처연한 것이었다.

“세상 모든 게 그렇듯, 보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다오.” 우루과이 화가 페드로 피가리의 ‘엘 탱고’.
독립은 외롭지 않았다
1816년,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홀로서기는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친구가 있었으니까. 영국이었다. 영국의 우정은 그러나 순수하지 않았다. 국제 정치에서 우정은 셈에 기반한 것이어서,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너른 대초원을 탐냈다. 산업혁명으로 의류 공장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양모 수요도 급증했는데, 아르헨티나 초원만큼 양 키우기 좋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제 스페인의 식민지가 아니라, 아르헨티나로 우뚝 서야 하오.” 아르헨티나 독립의 기점인 1810년 5월 혁명을 묘사한 그림.
영국은 미국에 뺨을 맞은 얼얼함을 남미로부터 위로받고 싶었다. 아르헨티나는 땅이 넓었고, 자원이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신생 독립국으로 어리숙해서 제격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먹잇감이었던 셈. “자유 무역은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웃으며 접근하는 영국이, 아르헨티나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그들에겐 무엇보다 젠틀하고, 친절한 동맹이 필요했으니까.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영국의 상인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그 뒤를 영국산 수입물이 덩어리째 따랐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름처럼 좋은(Bueno, 스페인어로 좋은) 공기(Aires·공기)로 가득했다. 독립국은 애국심이나 치기로만 세워지지 않는 법이어서 도로, 철도, 상하수도와 같은 사회적 인프라가 필요했다. 이 돈을 대겠다고 나선 건 영국의 투자자들이었다. 영국 투자은행 베어링 브라더스는 1824년 아르헨티나에 100만 파운드 돈을 빌려줬다. 아르헨티나는 초원에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소와 양을 길렀고, 도시에 영국인이 좋아하는 맥주를 팔았으며, 영국인이 죽고 못 사는 축구장을 지어댔다. 가톨릭 국가였던 아르헨티나에 영국을 위한 개신교 교회가 세워질 정도였다.

“영국이 우리 파타도니아 양을 왜 좋아하는 거양?” 파타고니아 초원의 양 목장.
영국, 친구에서 지배자로
아르헨티나가 점점 영국화될수록, 어찌 된 일인지 양국의 관계는 동등해 보이지 않았다. 무역 동반자보다는 채권자-채무자 관계로 보였다. 1833년 영국이 아르헨티나 앞바다의 포클랜드섬을 점령했을 때, 아르헨티나는 항의 문서만 한 장 보내는 것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영국이 아르헨티나에서 짐을 싸게 되면, 경제 재앙이 닥칠 것을 알아서였다.

때려도 묵묵한 아르헨티나가 기특해서, 영국은 더 많은 투자로 보답했다. 광활한 영토에 영국이 주도한 철도가 깔리고, 방방곡곡 도시가 들어서자, 아르헨티나는 보다 늠름해졌다. 영국도 이를 기껍게 바라봤는데, 아르헨티나의 이익이 영국의 이익이 될 수 있어서였다. 아르헨티나의 기차는 영국의 석탄을 먹고 달렸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행여 형님의 심기가 불편할까 싶어 영국 철도 회사들에게 수익률을 보장하는 법까지 통과시켰다.

“아르헨티나 땅이라고요? 그럼 우리 영국 땅이네요.” 1834년 영국 해군 HMS비글호가 포클랜드를 점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1870년, 아르헨티나의 길이 크게 열렸다. 냉장선이 개발되면서였다. 아르헨티나산 질 좋은 소와 양과 밀은 새로운 땅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팜파스 대초원의 소고기가 영국 철도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냉장선에 실려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양모와 양가죽만 팔아 먹고살던 아르헨티나는 달라져 있었다. 유럽인과 미국인은 아르헨티나산 소고기를 썰었고, 아르헨티나산 밀로 빵을 구웠다. 세계의 곳간,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별명이었다.

목조 주택이 석조 저택으로 바뀌고, 거적때기를 걸치던 시민들은 정장을 빼입었다. 수출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40년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6%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로 불렸다. 세계 10대 부국의 명단에 아르헨티나가 들어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과 어깨를 견줬다. 유럽의 사교계에는 “Riche comme un Argentin”(아르헨티나 사람처럼 부유하다)는 조어가 유행했다.

1907년 영국 개발자들이 개통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콘스티투시온 기차역.
“파리냐고요? 부에노스아이레스입니다.” 1905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미의 파리로 불리던 도시.
아르헨티나, 남미의 파리로 가다
성장하는 도시는 사람을 먹고 자라는 법이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전 세계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1870년 180만명이었던 인구는 50년만에 4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남미의 파리’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던 이민자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아르헨티나는 여자가 오기엔 너무나 멀고, 거칠었기 때문이었다.

거대 함선에서 내리는 남자들이 처음 목도한 것은 도시에 가득한 남자였다. 극단적 남초 도시에서, 새로 온 이민자들은, 모골이 송연했다. 영락없이 총각 귀신으로 죽어야 할 운명을 직감해서였다. 이때부터였다. 매춘의 씨앗이 고약하게 발아하고 있었던 건.

“우리 이탈리아 남자들은, 여자 없이는 못 살아요.” 이민자 숙소로 실려 가는 이탈리아 출신 아르헨티나 이민자들.
극단적 남초사회에서 가장 유망한 비즈니스는 성매매였다. 고된 노동에 지친 이민자들은 작은 공동주택인 콘벤티요에서 냄새나는 사내들끼리 다닥다닥 붙어 자야 하는 신세였다. 고향 생각에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았다. “좋은 데 가자”는 동료의 꾀임에 너도나도 윤락업소를 들락거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성매매 업소가 난립했다.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포주들이 악사를 고용했는데, 몸이 달아오른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춤을 추면서 ‘탱고’가 탄생했다.

지어도 지어도 손님들로 들끓어서, 포주들은 전문적으로 동유럽에서 인신매매 단체(즈위 미그달)를 굴리기도 했다. 괜찮은 신랑감을 소개해주겠다는 말에,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주겠다는 말에, 동유럽의 여성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윤락 여성으로 팔려나갔다.

“여기 정말 신세계 맞아요?”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로 몰려온 유럽 이민자들.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한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경제 거인이었지만, 그들에겐 목줄이 채어 있었다. 경제를 쥐고 흔드는 건 여전히 영국이어서였다. 대형 상선은 대부분 영국의 리버풀항으로 향했다.농축산물을 팔고 들어오는 돈에 취해, 아르헨티나는 제조업이라는 새로운 국부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영국에서 사 오면 그만이었으니까.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제6 자치령으로 불렸다. 영국이 기침하면, 아르헨티나는 폐렴을 앓았다. 영국 베어링 브라더스 은행 파산 위기로 런던 금융시장이 흔들리자, 아르헨티나는 10년 동안 경제 불황에 시달렸다.

“우린 영국 없인 안 돼...” 19세기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1929년 대공황은 규모가 큰 경제 지진이어서, 두 나라 관계의 축도 흔들렸다. 영국이 수출을 줄이면서, 아르헨티나는 대형 고객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더해, 영국은 무역 수지를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관세 혜택을 식민지에만 제공하는 체제를 구축했다(오타와 회의). 근 100년을 영국만 바라봐 온 관성에 목이 메서, 아르헨티나는 다시 영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는데, 영국 자본과 기업의 이익을 대폭 보장하는 굴욕적 협상이 체결됐다. ‘로카-러시먼’ 협정이었다.

영국산 석탄에 무관세를 부여하고, 영국계 철도와 트램 회사에 수익을 확대 보장하며, 외환 수입을 영국 채무 변제에 먼저 할당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자국 육류 수출의 유통 권한을 영국 냉장 회사들에 공식적으로 위임했다. 이 나라의 지도자가 아르헨티나의 리더인지, 아니면 영국의 총독인지, 시민들은 헷갈렸다.

“날 떠나지마, 제발 날 떠나지마~” 아르헨티나 부통령 훌리오 로카(펜 든 남자)가 영국 무역 특사 런시먼 경이 제시한 협정에 서명하는 모습.
“아빠, 이 아사도도 영국 사람들 거죠?” 아르헨티나 화가 이그나시오 만초니의 ‘아사도’.(1888년) 아사도 는 아르헨티나의 국민 고기요리다.
반영 감정이 싹트다
아르헨티나에서 조금씩 반영(反英) 감정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협정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굴욕적인지를 폭로한 의원이 살해당하는 참극까지 벌어졌다. 반영 감정은 묘목에서 거목으로 순식간에 자라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질서가 새로 서게 되었을 때, 아르헨티나도 새출발하고 싶었다. 진저리가 나는 영국과의 관계를 끊고 싶어서, 대통령을 새로 세웠다. 대표적 반영주의자 후안 페론이었다. 지지자들의 열화에 페론도 몸이 달아서 1946년 취임 일성으로 “경제 해방”을 선언했다.

나는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오, 하지만 결과는 장담하지 못하오. “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대통령. 1950년께.
영국 자본이 소유한 아르헨티나 철도 자산을 전부 사들였다. 아르헨티나의 이별 선언이, 영국도 싫지만은 않았다. 전후 후유증으로 복구 자금이 절실한 상황에서, 아르헨티나가 고철에 가까운 노후 철도 자산을 사줬기 때문이었다. 130년, 양국의 기울어진 애증관계는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아르헨티나는 웃지 못했다. 페론이 사들인 철도는 고물에 가까웠다. 세계의 수출 창고로 빛나던 시절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시골의 물건을 도시로 옮기는 정도에 불과했다. 매년 막대한 적자가 쌓여갔다.

페론은 국부를 희생해,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는 정치인이었다. 빚이 쌓여서, 경제가 어려워지자, 국고를 풀어 노동자들의 배를 불렸다. 후대 학자들은 이를 포퓰리즘, 페론주의라고 불렀다. 수익이 없고, 복지만 가득한 곳에서, 기업이 남아 날 리가 없는 법이어서, 영국의 기업들은 시나브로 짐을 싸고돌아 갔다. 페론은 의기양양했다. 민간 기업이 없으면, 공공기관을 세워서 시민을 채용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아르헨티나는 침몰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것을 아르헨티나인에게로... 페론 만세.” 국유화를 찬양하는 포스터.
페론주의로 자멸한 아르헨티나
포퓰리즘은 중독과 같은 것이어서, 페론의 후임 대통령들도 페론주의를 폐기하지 못했다. 국가가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다는 기만에, 시민들은 중독된 상태였다. 국부가 상인의 창조성과 시민의 근면에서 나온다는 기본 원칙을 아르헨티나는 알지 못했다. 이 나라의 돈은 시민의 피땀으로 일궈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선심성으로 찍어낸 것이어서, 외환 시장에서 신뢰를 잃었는데, 그 결과는 초인플레이션이었다. 국가 신뢰도가 급락하고, 중산층이 붕괴하자, 군부가 나서서 정권을 탈취했다.

위기에 몰릴 때, 남 탓만큼 좋은 탈출구는 없는 법이어서, 군부는 “이 모든 게 영국 탓”이라면서, 군사를 일으켰다. 아르헨티나 앞 바다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영국령 포클랜드를 공격했다(1982년 포클랜드 전쟁).

“가자 아르헨티나를 혼내주러.” 1982년 4월 19일자 뉴스위크지 표지에 그려진 영국 해군 기함 HMS 헤르메스.
군부는 경제를 모르는 만큼이나, 국제 정서에 까막눈이었는데, 영국의 수상은 철의 여인 ‘마가릿 대처’였다. 헤어진 지 40년이 지나서, “내 인생 망한 건 네 책임”이라며 찾아오는 옛 애인이, 영국은 우스웠다.

대처의 영국군은 대서양을 건너와야 하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아르헨티나군을 손쉽게 요리했다. 74일의 교전 끝에 아르헨티나는 항복을 선언했다. 군부는 경제도 못 하고, 전쟁도 못 하는 맹꽁이에 가까웠다. 대처는 이 승리를 기반으로 분열된 영국을 통합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여전히 넓게 퍼진 안갯 속이다. 그들에게 남은 건 탱고와 축구와 소고기. 영국의 유산뿐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은 졌지만 축구에선 이겼다오.” 1986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골을 넣은 마라도나. 전쟁도, 경제도 진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축구는 마지막 기쁨일지도 모른다.
<네줄요약>

ㅇ아르헨티나는 독립 직후 영국과 특수관계를 맺고 경제를 발전 시켰다.

ㅇ한 때, 남미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크게 번성했으나, 영국에 경제적 종속도 심화됐다.

ㅇ결국 후안 페론 대통령이 자립을 선언했으나, 경제는 오히려 고꾸라졌다.

ㅇ아르헨티나는 위기 타개책으로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으나, 잉글랜드에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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