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 유산 읽기] (23) 밀양 서고정사와 퇴로리 돌담마을
조선 말 실학자 이익구가 화악산 기슭에 지은 서고정사
후학 가르치고 독서·저술에 전념하기 위해 1898년 건립
전근대 문화 아우르는 퇴로마을 고택과 돌담길 눈길
가산저수지의 고즈넉한 풍경은 이방인 발길 붙잡아

서고정사 마당의 연못 활수당. 정면의 서고정사 왼쪽으로 한서암이 보인다./김홍섭 소설가/

◇문화유산자료 서고정사(西皐精舍)
밀양 퇴로리에는 조선 후기 실학의 정신을 잇는 유서 깊은 공간이 있다. 개항기 누정, 서고정사가 바로 그곳이다. 바른 명칭은 밀양 서고정사(密陽西皐精舍)로, 항재 이익구가 두 동생과 함께 1898년 화악산 기슭에 건립한 별장이다. ‘서고(西皐)’는 마을 서쪽의 작은 언덕이라는 뜻이고, ‘정사(精舍)’는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집을 말한다.
여주이씨가 밀양으로 온 까닭은, 시조 교위공(校尉公) 이인덕(李仁德)의 12세손 이사필(李師弼)이 1500년 전후 무렵 사인당리의 처가로 이사함으로써 밀양의 여주이씨 입향조가 된다. 사인당리는 현재의 밀양 용평동이다. 입향조의 13세손이자 도원(桃源) 이종극(李鍾極:1811~1859년)의 큰아들 이익구는 퇴로리에서 한말의 국운 회복은 오로지 실사구시의 보급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경사를 연구하고 후진을 교육하는 데 전념했던 실학자였다.
손자가 성헌(省軒) 이병희(李炳熹:1859~1938년)의 아들로 한국학 권위자인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이다. 내벽에는 이익구 자찬의 ‘항재잠’, 이병희(李炳憙)의 ‘서고정사기’,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의 ‘항재기’(1914년) 등 여러 시판이 걸려 있다. 밀양 서고정사는 2009년 10월 2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7호로 지정됐다. 이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된다.

서고정사.

아래채 한서암.
◇항재 이익구, 그는 누구인가
조선 말기 학자. 자는 능백(能伯)이고, 호는 항재(恒齋)·서고산인(西皐散人)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출신지는 경상남도 밀양이다. 이사필(李師弼)과 자유헌(自濡軒) 이만백(李萬白)의 후손으로, 부친은 도원(桃源) 이종극(李鍾極)이다. 동생으로 정존헌 이능구(靜存軒 李能九)와 용재 이명구(庸齋 李命九)가 있다.
타고난 자질이 워낙 뛰어나 10여 세에 경사(經史)를 모두 통독했다고 한다. 영남의 석학으로 꼽는 이종상(李鍾祥)·최효술(崔孝述)·이돈우(李敦禹) 등과 학문적 교유가 깊었으며, 사례·오례·사상례·거가잡의 등을 참고해 예학을 집대성했던 선비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871년(고종 8년) 밀양 단장면(丹場面) 고사촌(姑射村)으로 이사한 후 후학 양성에 힘썼다. 또 고을에 흉년이 들고 돌림병이 돌자,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수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당시의 정치 문란에 고개를 돌렸고, 또한 개항 후 시대적 격변을 보면서 벼슬에 대한 뜻을 완전히 접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년) 두 동생과 함께 밀양 부북면 퇴로리로 이사한 후, 문중은 효성과 우애로써 다스리고, 고을은 동약(洞約)과 학계(學契)를 만들어 교화하는 데 힘썼다. 동약은 조선 중기 이후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와 부세(賦稅)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동 단위의 자치 조직이다. 학계는 교육이나 학비 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계를 말한다. 또 이창(里倉)이라고 부르는 마을 창고를 설치해 어려운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전념했다.
실학자답게 1907년 향리에 민족 교육기관인 화산의숙을 설립했고, 선조인 실학자 이익의 문집을 펴내는 등 지도층의 책무를 실천하려고 애쓴 선비 가문으로 꼽히고 있다. 당초 화산의숙에는 일본인 교사 2명을 초빙해 신학문과 함께 측량기술 등을 가르친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본인 교사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화산의숙을 폐지한 후, 세상일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하고 집필에만 전념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퇴로마을 돌담길.
◇서고정사기(西皐精舍記)
서고정사 마루에 올라서면 몇 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중 ‘서고정사기’는 이 누정을 지은 연유를 향기로운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석본 일부분을 가져온다.
‘응천(凝川)의 북쪽 20리쯤에 울창하고 깊은 빼어난 봉우리가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피지 않은 연꽃 봉오리가 물 위로 나와 꽃받침이 나뉘어 받치고 있는 듯한 것이 화악(華岳)이다. 화악의 한 갈래가 북에서 남으로 마치 옥 죽순이 밀고 나와 금병풍을 펼쳐 놓은 듯 구불구불 둘러싸여 깊숙하게 특별한 한 구역을 만든 곳이 퇴로촌이다. 마을 서쪽으로 200보를 가면 산기슭을 감아 돌아 숲과 골짜기 그윽한데 샘물 소리가 마치 고리 패옥이 울리는 듯하니 곧 정사가 있는 곳이다.

정자에서 본 퇴로마을 가산저수지.
◇퇴로마을과 가산저수지

퇴로마을 입구의 돌탑.
마을로 들어서면 우선 상당히 정성을 들여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탑 두 개가 이방인을 반겨준다. 얼핏 보면 생김새가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 두 개를 재현한 모습이다. 그 주변으로 근대한옥들이 모여 있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돌담들이 길게 이어지면서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고 있는데, 몇 걸음 걸어보면 바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규모가 제법 있는 고택은 ‘이씨 고가’로 불린다. 퇴로리에 집성촌을 형성한 여주이씨 자유헌공파 종갓집으로 이익구가 1890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 돌담을 따라 걷는 행위는 시간을 건너뛰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에서 과거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마을 앞 한적한 도로를 따라 걸으면 드넓은 저수지와 만난다. 가산저수지로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곳이다. 용도를 떠나 겨울 저수지를 따라 걸으면 꽁꽁 언 수면이 햇살을 반사하는데, 눈부신 반사 햇빛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철새 떼들의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마을은 체험관광마을로 조성되어 있어 평소에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은 이방인들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든 듯 마을이 고요하기만 하다. 따스한 봄이 오면 다시 한번 찾기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 돌린다.
김홍섭(소설가)
Copyright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