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심 박은 허리로 하늘을 난 소녀... 전설이 되다 [이달의 스포츠 핫 피플]
편집자주
최근 가장 '핫'한 스포츠 이슈를 찾아 주요 인물의 스포츠 인생을 정리해보는 코너입니다. 프로 무대의 스타플레이어를 비롯해 아마추어 '신성', 지도자, 체육단체장 등 하루하루 숨 가쁘게 변화하는 스포츠 세상 속에 사는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봅니다.

눈발이 사납게 흩날린 13일 이탈리아 리비뇨 설산 위에 한 소녀가 쓰러졌다. 스노보드를 타고 호기롭게 하프파이프 레이스에 나선 그는 첫 점프에서 멋들어진 공중회전 기술을 선보였지만, 두 번째 점프 과정에서 하프파이프 상단에 보드가 걸리며 크게 넘어졌다. 머리부터 떨어지는 아찔한 장면이 펼쳐지자, 경기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의료진이 급히 투입됐지만 소녀는 꽤 오랜 시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무릎이 움직이지 않았다. 들것에 실려 내려가면 다음 기회를 받지 못하고 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료진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거듭 요청하며 시간을 번 소녀는 발가락부터 조금씩 움직이며 몸을 추슬렀고, 불행 중 다행으로 스스로 일어나 슬로프를 내려왔다.
그러나 그가 받아 든 점수는 10.00점, 순위는 전체 12명 중 9위였다. 모두가 그의 첫 올림픽 도전이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영화 같은 반전을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설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최가온(18)의 '금빛 여정'을 '이달의 스포츠 핫피플'에서 돌아봤다.
놀이터가 된 설원

'금메달리스트'는 떡잎부터 달랐다. 7세 때 가족들과 함께 처음 스키장을 방문한 최가온은 설상 스포츠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이후 매년 겨울 설원을 누볐다. 그는 본보와 인터뷰에서 "첫 스키장 방문 당일의 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자유롭고 즐겁고 재밌었다'는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돌아봤다.
딸의 달뜬 표정을 읽은 아버지 최인영씨는 방학 때마다 최가온을 슬로프로 데려가 기본 동작을 반복해서 가르쳤다. 처음엔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한 놀이였지만, 해가 거듭되면서 최가온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점프의 매력과 공중에서의 체공감이 주는 짜릿함에 흠뻑 매료된 그는 결국 중학교 진학 후 본격적으로 선수의 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체계적인 훈련에 돌입하자 최가온은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2022년 국제스키연맹(FIS)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일회성 '반짝 우승'도 아니었다. 이듬해 1월 세계 최대 익스트림 스포츠 대회인 X(엑스)게임 슈퍼파이프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만 14세 3개월)을 차지했고, 같은 해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2023 FIS 하프파이프 월드컵에서도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제 막 10대 중반에 들어선 최가온의 앞날엔 탄탄대로만 펼쳐질 듯 보였다.

시련으로 더욱 단단해진 '고교생 보더'
그러나 막 꽃봉오리를 피운 최가온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2024년 1월 스위스 락스에서 열린 월드컵 도중 허리 부상을 당해 수술대에 올랐다. 철심을 박아야 할 정도의 대수술이었다. 최가온은 "경기 시작 20여 분을 앞두고 연습하다가 허리가 부러졌다"며 "현지에서 1차 수술을 받았는데, 염증이 생겨 귀국 후 또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설명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자 정신력도 흔들렸다. 그는 "삶이 우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며 "보드를 계속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번에도 스노보드가 최가온의 가슴을 다시 뛰게 했다. 보드를 타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꼬박 1년간 지난한 치료와 재활에 매진했다. 최가온은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재활센터에서 하체와 엉덩이 근력을 집중적으로 키우는 훈련을 성실히 소화했다"며 "부모님께 꾸준히 마사지도 받고 칼슘도 열심히 먹으면서 복귀를 준비했다"고 전했다.

부상을 극복하고 맞이한 2024~25시즌, 그는 거짓말처럼 다시 비상했다. 1년 전 허리 부상을 당했던 바로 그 대회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재기에 성공했고, 곧바로 미국 콜로라도로 날아가 월드컵 은메달까지 수확했다. 어느새 1년 앞으로 다가온 동계올림픽에서도 '해볼 만하다'는 분위기가 조심스럽게 형성됐다.
마지막 산… '우상' 클로이 김
마침내 찾아온 올림픽 시즌에 최가온은 쾌조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중국에서 열린 시즌 첫 월드컵을 시작으로 3개 대회를 연달아 석권한 뒤 이탈리아로 향했다. 최가온은 올림픽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부상 복귀 직후엔) 내 몸 상태에 대해 스스로도 불안한 면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확실히 폼이 올라온 느낌"이라며 "(올림픽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입상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가 올림픽 포디움에 서기 위해선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자신의 우상이자 라이벌인 클로이 김(26·미국)이다. 클로이 김은 2018 평창·2022 베이징 대회 여자 하프파이프 금메달리스트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스노보드 최초 3연패에 도전장을 내민 상태였다.

둘의 각별한 인연도 '진검승부'에 서사를 더했다. 최가온의 가족과 클로이 김의 가족은 2018 평창 대회를 계기로 인연을 맺은 뒤 꾸준히 교류를 이어왔다. 특히 클로이 김의 아버지 김종진씨는 최가온에게 벤 위스너 코치를 소개했고, 그는 약 5년간 최가온을 지도하며 기술과 멘털을 다듬었다. 최가온도 평소 클로이 김을 '언니'라 칭하며 잘 따랐다. 그는 지난해 12월 콜로라도 월드컵을 마친 후 "언니가 맛있는 도넛을 사준다고 했는데, 결선 직전 언니 몸 상태가 좋지 못해 같이 먹지 못했다"며 여고생다운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클로이 김이 이번 올림픽 1차 시기 직후 자신의 성적(88.00점·당시 1위)에 기뻐하기보다, 울먹이며 최가온을 다독였던 것도 둘의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전 3기'로 완성된 '금빛 서사'
아버지의 지지와 클로이 김의 응원을 등에 업고 다시 출발선에 섰지만, 2차 시기에도 넘어졌다. 중간 순위가 11위까지 내려앉자, 새벽잠을 설치며 그의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 팬들 사이에서도 '쉽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나 최가온은 리비뇨 설산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시작된 마지막 3차 시기. 그는 반원통형 슬로프를 날아오르며 캡 더블콕 720과 백사이드 900 등 고난도 연기를 연달아 성공시켰다. 올림픽 첫 완주에 성공한 최가온은 90.25점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었고, 그의 이름은 단숨에 순위표 최상단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니었다. '현존 최강' 클로이 김의 마지막 질주가 남아 있었다. 앞선 2차 시기 완주에 실패하긴 했지만, 그는 이날 대체로 안정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이 김도 사람이었다. 3차 시기 클로이 김이 크게 넘어지면서 최가온의 우승이 확정됐다. 레이스를 마친 클로이 김이 펑펑 울고 있는 최가온을 끌어안아 주면서 고교생 보더의 험난했던 '금빛 서사'가 마침내 완성됐다.
안주하지 않는 챔피언
스포츠 선수는 언제나 결과로 평가받는다. 최가온이 만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전국구 스타로 떠오른 것도 이런 냉정한 생태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대중들이 그를 보며 울고 웃었던 건 단순히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13일 리비뇨 설산 위에서 펼쳐진 '2전 3기'는 최가온의 스노보드 인생이 함축된 한 편의 성장 드라마였다. 불과 2년 전 허리 골절로 선수생명에 위기를 맞았던 그는, 결국 이를 이겨내고 올림픽 포디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심지어 대회 전 손바닥뼈 세 곳이 골절됐다는 사실까지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의 불굴의 의지가 또다시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미 완벽한 드라마를 완성했음에도 최가온은 안주하지 않는다. 그는 14일 이탈리아 밀라노 코리아 하우스에서 열린 메달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 "이번 올림픽에서 최고의 런을 보여주진 못했다"며 "기술 완성도를 좀 더 높이고, 멘털도 강화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경기 직후 "앞으론 나를 뛰어넘는 선수가 되겠다"던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또다시 떠나는 여정 앞에서 최가온은 더 많은 관심과 지원도 부탁했다. 그는 "한국에는 하프파이프 연습 시설이 단 1개뿐인데, 그마저도 파이프가 완벽하지 않아 많이 아쉽다"며 "일본은 여름에도 훈련할 수 있는 에어매트 시설이 있는데, 한국에는 없어서 매번 일본으로 가야 한다. 한국에서 오래 훈련할 수 있게 관련 시설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성취뿐 아니라 한국 설상의 저변 확대까지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가온의 진짜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대통령, 29년 보유한 분당 집 내놨다… 靑 "부동산보다 금융투자가 이득"-정치ㅣ한국일보
- '강북 모텔 살인' 20대 여성, 추가 범행 정황…"와인 마시다 쓰러졌다"-사회ㅣ한국일보
- 박소영 아나운서, 8살 연상 양세형과 염문... 만남 비화 고백-문화ㅣ한국일보
- "숨이 안 쉬어져" "빨리 와주세요"… 은마아파트 화재 최초 신고자는 숨진 10대 여학생-사회ㅣ한
- "카페서 3인 1잔"… 40억 자산가 전원주, 민폐 논란-문화ㅣ한국일보
- "명절 귀성용 애인 대행 찾아요" 베트남 MZ도 결혼·출산 거부... '황금인구' 종말까지 10년-국제ㅣ
- 나이 많으니 감형?… 윤석열 판결이 재소환한 '고령 감경' 논란-사회ㅣ한국일보
- 호킹 박사가 비키니 여성들과… '엡스타인 문건' 사진 두고 논란-국제ㅣ한국일보
- 강남 수선집, 루이뷔통 이겼다... 대법 "개인 사용 리폼 상표권 침해 아냐"-사회ㅣ한국일보
- '5살 연하와 재혼' 최정윤 "가족, 이런 건가 싶어"... 직접 밝힌 근황-문화ㅣ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