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세계사 안 가르치는 나라

어수웅 논설위원 2026. 2. 27.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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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양진경

40년 전 대학 학력고사를 치를 때 ‘세계사’를 선택했다. 지리와 세계사 사이에서 압도적인 암기량과 방대한 범위를 자랑하는 세계사를 고집했던 건 일종의 지적 승부욕이었다. 촘촘한 역사의 인과관계가 드라마처럼 재미 있었고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의 이치가 이런 것인가 느껴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입시 현장에서 세계사는 ‘역덕(역사 덕후)’들만 찾는 기피 과목이다. 2014년 선택 과목제가 도입된 이후 학생들은 분량 적고 점수 따기 쉬운 과목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요즘 세계사 선택률은 5~8%대로 최하위다.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에서 한국의 젊은 커플을 만난 적이 있다. 정교한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문양 앞에서 그들은 “가톨릭 성당이라는데 왜 실내가 이렇게 특이하냐”며 궁금해했다. 스페인 남부 지역이 오랫동안 이슬람 지배를 받았고 기독교 세력이 이를 다시 정복했다는 역사를 모르는 듯 했다. 이는 상식에 가까운 세계사이지만 대부분 한국 청년 세대는 학교에서 배울 기회 자체가 없는 지식이다.

▶한국만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가까이는 중국, 일본 역사에 직접 영향을 받았고 결국 유럽의 발전이 가져온 제국주의 폭풍우가 한국 역사를 덮쳤다. 중국 아편전쟁, 미국 페리 제독 흑선(黑船)의 일본 출현, 메이지 유신을 모르고 우리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없다. 이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을 모른 채 한국사만 들여다보는 건 바다를 안 보고 작은 배 속만 들여다보는 격이다.

▶일본은 2022년부터 일본사와 세계사를 통합한 ‘역사총합’을 고교 필수 과목으로 가르친다. “일본사만 배우면 바보가 되고, 세계사만 배우면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된다”는 생각이다. 적도는 뜨겁고 북극은 춥다며 각국 지리와 기후만 가르치는 한국 초등학교와 달리, 유럽의 초등학교는 왜 세계는 서로 싸우고 합쳐서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공부한다.

▶교육부가 최근 중학교 역사 수업에서 우리 근현대사 비중을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발표 내용을 아무리 읽어봐도 세계사 교육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서울대는 반세기 넘게 고수해 온 국사·동양사·서양사학과의 장벽을 허물고 지난 2023년 ‘역사학부’로 통합했다. 아편 전쟁(동양사)을 모르고 어떻게 강화도 조약(국사)을 가르치며, 제국주의(서양사)를 모르고 어떻게 근현대사를 이해하느냐는 기초적 문제 의식이 그 안에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학교는 여전히 세계사를 선택 과목의 구석방에 가두고 학생들을 국사 외눈박이로 만들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 맞느냐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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