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보복 내세운 쿠팡의 ‘공포 마케팅’[박상영의 경제본색](14)

2026. 2. 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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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로저스 쿠팡 한국법인 임시 대표(왼쪽)가 지난 2월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연방 하원 법사위에서 비공개 증언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들어 외국계 기업의 경우 정치·경제·기술 패권이 얽힌 복합 전쟁터로 변모하고 있다. 자국의 규제가 통상 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 마케팅’이 규제 당국에 실질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2021년 한 포럼에서 “고객들이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말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쿠팡이 일상 속에서 물건을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생활 인프라로 자리 잡겠다는 포부였다.

그러나 최근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한·미 통상 분쟁으로 비화하면서 ‘쿠팡 없는 세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쿠팡에 대한 국내 규제가 외교적 마찰로 번질 경우, 한·미관계 전반에 돌이킬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기업의 관리 소홀에 따른 ‘개인정보 유출’ 문제였지만, 쿠팡의 미온적인 대응이 논란의 불씨를 플랫폼 운영 전반의 불공정 행위로 확산시켰다. 특히 조사 과정에서 입점 업체의 판매 데이터를 부당하게 활용하고 내부거래를 일삼았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정부로서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에 맞서 미국 투자자들이 조사에 나선 한국 정부를 ‘차별적 행위’로 규정하며 국제투자분쟁(ISDS) 절차에 착수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최근 쿠팡 투자자인 그린옥스와 알티미터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한국 정부의 쿠팡 관련 조치를 조사하고, 무역법 제301조에 근거해 관세와 기타 제재를 포함한 무역 구제 조치를 요구했다.

‘슈퍼 제301조’로 불리는 무역법 제301조는 외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조사하고, 필요하면 관세 등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해주는 미국 무역법상의 대표적 수단이다. 트럼프 행정부 1기 당시, 미국은 제301조를 근거로 중국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한 바 있다. 최근 상호관세가 미연방대법원 판결로 무력화되면서 무역법 제301조는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통상 압박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월 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트럼프위협저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미국의 쿠팡 사태 압박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새로운 국면 맞은 플랫폼 규제

이는 지금까지 보아온 정부와 기업 간의 갈등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과거의 갈등은 주로 ‘경영 효율성’을 내세운 기업과 ‘공정 경쟁’을 강조하는 규제 당국 간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최근 공정위의 제재를 받은 네이버와 카카오와 같은 플랫폼 기업의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 기업은 자사 우대를 위한 알고리즘 변경을 고유한 ‘사업 모델’로 주장했으나 공정위는 시장지배력을 이용한 ‘의도된 차별’로 규정하며 대립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외국계 기업의 경우 단순 ‘기업 vs 정부’ 구도를 넘어 정치·경제·기술 패권이 얽힌 복합 전쟁터로 변모하고 있다. 기업 역시 이러한 구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자국의 규제가 통상 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 마케팅’이 규제 당국에 실질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이 같은 기조는 더욱 강화됐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인사청문회 당시, 유럽연합(EU)과 한국 등의 온라인 플랫폼 기업 독과점 규제 움직임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 국가의 고유한 권한인 입법권마저 부정·침해하는 발언이자,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해 상대국의 정책 자율성을 무력화하려는 고강도 압박으로 읽힐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보복성 제재로 이어진 사례도 존재한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해 말 디지털서비스법(DSA) 제정을 주도한 유럽연합(EU) 인사 5명을 비자 발급 제한 대상으로 지정하며 전례 없는 강수를 뒀다. 불법 콘텐츠 근절과 소비자 피해 방지에 초점을 맞춘 DSA는, 거대 플랫폼의 독점을 규제하는 디지털시장법(DMA)과 더불어 입법 단계부터 미국 기업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던 법안이다.

당시 미 기업들은 이 법안들이 미국 기업만을 표적으로 삼은 ‘차별적 규제’라며 거세게 비판했고, 결국 미 정부가 인적 제재라는 실력 행사를 통해 자국 기업 보호에 나선 것이다. 당시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은 “그들이 반대하는 미국의 시각을 검열하고 수익 창출을 제한하기 위해 미국의 플랫폼 기업들을 강압하는 조직적 시도를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쿠팡 사태가 특정 기업과 정부의 문제를 넘어 관세율 등 통상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조원식 공정거래위원회 유통대리점조사과장이 지난 2월 26일 정부세종청사 공정위 기자실에서 쿠팡의 대규모유통업법 위반행위 제재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세 보복’ 압박에 멈춰선 입법

미국은 이미 관세 협상에서 비관세 장벽을 거론하며 압박하고 있다. 지난해 말 체결한 한·미 관세 협상 팩트시트에는 망 사용료,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들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상황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책은 통상 마찰을 우려해 적극적인 제재를 피하는 것이다. 실제 온라인 플랫폼법의 입법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던 공정위는 최근 눈에 띄게 속도 조절에 나섰다. 거대 플랫폼 기업을 사전에 지정해 끼워팔기 등 시장지배력 남용을 원천 봉쇄하려던 ‘독점규제법’은 잠정 보류한 반면, 상대적으로 마찰이 적은 플랫폼과 입점 업체 간의 갑을 관계를 다루는 ‘공정화법’ 위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러나 통상 마찰을 우려해 플랫폼 규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이 된다. 대표적으로 자사 우대 알고리즘을 방치할 경우 플랫폼은 소비자에게 최적화된 상품이 아닌 자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상품만을 노출해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권을 침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쿠팡의 시장지배력이 공고해지면 신규 기업의 진입 장벽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시장 독점이 가속화될 경우 플랫폼은 구독료 인상이나 배송비 할증 등을 통해 언제든 소비자에게 비용을 떠넘길 위험이 크다.

나아가 인기 상품을 자체 브랜드(PB)로 전환하거나 직매입을 강요하는 식의 소위 ‘가로채기’ 행위가 계속된다면 중소 입점 업체들의 매출 기반마저 무너뜨려 유통 생태계 전반의 자생력을 해치게 될 우려도 크다.

이번 쿠팡 사태는 ‘통상 리스크’와 ‘플랫폼 리스크’가 결합해 서로의 덩치를 키우는 악순환의 기로에 서 있다. 통상 보복이라는 외부 압박에 밀려 국내 규제가 뒷걸음질 친다면 그 공백을 틈탄 시장지배력 남용과 소비자·입점 업체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할 수밖에 없다.

관세와 통상 보복의 공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플랫폼의 책임을 분명히 묻는 것, 그 균형점이야말로 이번 쿠팡 사태를 통해 한국 사회가 새롭게 세워야 할 기준이다. 이는 김범석 의장이 내세운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목표가 단순한 편의성의 찬사가 아니라 시민과 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인프라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박상영 기자 s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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