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1㎝라도 더 크게” 키플레이션에 성장 주사 열풍… ‘부작용 우려도’
月 100만원에도 “값어치 있다”
오남용 경계 목소리도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의 한 성장클리닉 앞. 10살 박모양은 할머니와 함께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이번에는 빼먹지 말고 잘 맞아야 한다”고 연신 타일렀다. 할머니 손에는 성장호르몬 주사기가 든 파란색 보냉 가방이 들려 있었다.
9살 김모군도 왼쪽 팔을 꾹 누른채 어머니와 함께 성장클리닉을 나섰다. 김군은 성장호르몬 주사 처방을 위해 이날 혈액 검사를 받았다. 김군의 어머니는 “키 크는 주사를 잘 놔준다고 해서 두 달이나 기다려 진료를 봤다”고 말했다.

키 크는 주사로도 불리는 성장호르몬 주사 수요가 커지고 있다. 과거 세대보다 평균 키가 커지는 ‘키플레이션(키+인플레이션)’ 현상이 그 배경으로 꼽힌다. 다만 정상 성장 궤도에 있는 아이들까지 무분별하게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성장호르몬 처방 2배 ‘껑충’
26일 서울 서초구의 한 성장클리닉에 전화로 진료를 문의했다. 예약 날짜로 오는 4월을 제시했다. 더 빠른 날짜가 없느냐고 묻자, “이미 꽉 차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최근 다른 성장클리닉에 아이와 함께 다녀왔다는 직장인 A(45)씨도 “검사를 받기까지 2개월 정도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사가 ‘1년 정도 더 지켜보는게 좋겠다’고 해 내년에 다시 가볼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성장호르몬 열풍은 통계로도 잡힌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19세 이하 미성년자에게 성장호르몬을 처방한 건수는 2020년 89만5011건에서 2024년 162만1154건으로 2배 가까이 뛰었다. 같은 기간 처방액도 약 597억원에서 1593억원으로 2.6배가량 증가했다.
갈수록 평균 키가 커지는 키플레이션 현상이 성장호르몬 인기의 배경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검진통계에 따르면 19세 이하 평균 키는 2024년 기준 남성 174.23㎝, 여성 161.86㎝다. 10년 전인 2015년보다 각각 0.82㎝, 0.87㎝ 커졌다.
세부적으로 따지면 차이가 더 크다. 최근 10년(2016~2025년) 병역판정검사 결과 171㎝미만 비율이 2016년 33.7%에서 2025년 27%로 줄었다. 같은 기간 176㎝~180.9㎝ 구간 비중은 22.6%에서 26.1%로 증가했고, 181㎝~185.9㎝ 비율 역시 10년새 8%에서 10.8%로 늘었다.

◇“가족 다 160㎝대인데 홀로 180㎝”
성장클리닉에서 만난 부모들은 하나같이 ‘키도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성장호르몬 주사 가격만 월 70만~80만원이고, 식습관과 운동 처방 등까지 병행하면 100만원이 넘는 가격대이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도 했다.
한 어머니는 “1㎝라도 더 클 수 있으면 이득“이라고 했다. 다른 어머니는 ”아이가 잘 생긴 편”이라며 “나중에 연예인을 시킬 수 도 있으니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추기로 했다”고 말했다.
성장호르몬 주사의 효과를 봤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김모(22)씨는 14세에 성장호르몬 주사를 2년간 맞았다. 그는 “집안 남자들 키가 160㎝대인데 주사를 맞은 나만 키가 180㎝가 넘는다”라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에 사는 이모(37)씨도 6살 아들에게 2년간 주사를 맞혔다. 그 결과 하위 3%에서 24%까지 15㎝ 자랐다. 이씨는 “어렸을 적 큰 키와 체격의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어 아이에게 성장 호르몬을 맞추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정상 범위’여도 묻지마 처방
문제는 제대로 된 검사 없이 성장호르몬 주사가 과잉 처방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5일 직접 찾아가 상담을 받아본 성장클리닉 3곳 모두 “성장호르몬이 정상 범위여도 처방해줄 수 있다”는 취지로 안내했다.
특히 A성장클리닉은 운영하는 유튜브에 ‘키 큰 남성, 돈 더번다. 한국 사회에서 슬픈 현실’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해당 영상에선 키 1cm가 커질수록 시간당 임금이 1.5%씩 상승한다는 논문을 인용해 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성장호르몬 주사가 필요한 경우에만 처방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키가 동일 연령 성별 대비 3% 이하이거나 성장호르몬 결핍증이 있는 경우, 질환에 의해 저신장으로 진단받은 경우 등이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성장호르몬 결핍이 아닌데도 투약하는 건 문제가 있다”라며 ”부작용으로 손, 발, 턱이 커지는 말단 비대증이나 녹내장 같은 시야 장애가 생길 수 있고, 당뇨병 발생 위험도 매우 높아질 수 있다”고 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6000피 올라타자”… 5대 은행 ‘마이너스 통장’ 40조원 돌파
- [르포] “1㎝라도 더 크게” 키플레이션에 성장 주사 열풍… ‘부작용 우려도’
- [동네톡톡] 장학금에 60년 세수 확보... 원전 유치전 불붙었다
- 통계도 없이 다주택자 때렸나…금융 당국, 자료 수집 분주
- [단독] 인사 유출 홍역 치른 삼성바이오, 이번엔 “주 4.5일·ADC 수당” 노사 갈등 뇌관
- 中, 성숙 공정 파운드리 확대… “삼성전자·TSMC 시장 파이 잠식"
- 2월 아파트 가장 많이 팔린 곳 ‘노원구’… 매매 15억 이하가 85%
- [세상을 바꾼 표준]⑧ 배에 실은 컨테이너가 촉발한 ‘물류 혁명’
- 지난달 서울 주택 공급 지표 일제히 악화…강력 규제에도 주택 거래량은 ‘껑충’
- “임대주택도 한강뷰 배정”… 9월부터 공개추첨 안 하면 재건축 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