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팬이 한류 적이 됐다" 대포 카메라 하나가 쏘아 올린 반한(反韓) 연대

김태현 기자 2026. 2. 2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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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가 10년을 공들여 쌓은 것을, 온라인 혐오 게시물 몇 줄이 허물고 있다. 그 시작이 공연장에서 몰래 꺼낸 카메라 한 대였다는 사실이, 이 사태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우먼센스] 설 연휴가 끝나갈 무렵, 소셜미디어(SNS)는 전쟁터가 됐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필리핀 등지의 누리꾼들이 하나의 해시태그 아래 뭉쳤고, 한국인들은 그 정중앙에 놓였다. '#SEAbling', '#BoycottKorea'라는 이 사태 시작은 놀랍도록 작은 곳에서 비롯됐다. 공연장 안으로 몰래 반입된 카메라 한 대였다.

지난 1월 31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연장에서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케이팝 밴드 데이식스(DAY6)의 콘서트가 한창 진행되던 중 소란이 빚어졌다. 반입 자체가 금지된 고배율 촬영 장비를 들고 입장하려던 한국인 팬이 현장 보안팀과 충돌하는 장면이 관객들 사이에서 속속 촬영됐고, 그 영상은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온라인을 달구기 시작했다. 주최 측은 입장 전부터 촬영 장비 반입 금지를 명시했으며, 해당 팬은 이후 사과 의사를 밝혔다.

여기까지였다면 팬덤 내부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됐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K팝 좋아하면 한국 문화도 존중해라"라는 말이 불씨가 됐다. 

규정 위반을 지적하는 현지 팬들의 목소리가 SNS를 타고 퍼지자, 일부 한국 누리꾼들은 사과나 수습 대신 반격을 택했다. "한국 가수 좋아하면서 한국 팬은 왜 무시하냐"는 식의 반박이 쏟아졌고, 쟁점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갈등의 성격도 바뀌었다. 규정 위반 여부를 따지는 논쟁에서, 서로의 존재 자체를 공격하는 싸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진=X 캡처

최초 빌미는 한국 팬이 줬다면, 기름을 부은 건 말레이시아 팬 일부의 행동이었다. 이들은 문제의 한국인 팬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온라인에 올리고, 외모를 조롱하는 댓글을 유도했다. 개인을 특정해 망신을 주는 방식의 이 '신상 털기'는 한국 누리꾼들의 감정에 불을 질렀다. "규정을 어긴 건 잘못이지만, 얼굴을 공개적으로 박제하는 건 다른 문제"라는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는 당사자를 향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전체를 향했다.

이후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동남아시아 팬들의 외모, 경제 수준, 음식 문화를 싸잡아 비하하는 게시물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케이팝 팬덤 사이의 말다툼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왜 저 나라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는 정서로 변질돼 있었다.

반응의 고리는 삽시간에 확장됐다.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필리핀 누리꾼들이 차례로 가세하며 '한국 대 동남아시아 전체' 구도가 굳어졌다. 한국 측 일부가 AI 이미지 생성 도구를 활용해 동물 사진에 동남아 각국 국기를 합성·배포하자, 동남아 측에서는 한국의 성형 의존도와 주거 환경을 조롱하는 게시물로 응수했다. 특정 게시물의 조회수가 8000만 회를 돌파하는 등 확산 속도는 걷잡을 수 없었다.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사진까지 희화화 맥락에서 소비되며 국내에서도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번 충돌이 갑작스럽게 터진 것이 아니라고 짚었다. 블랙핑크 리사를 비롯한 동남아 출신 케이팝 멤버들을 향해 오랜 기간 반복돼온 외모 비하 발언들이 팬덤 내 정서적 지뢰밭을 형성해왔고, 이번 사건이 그 위를 밟은 셈이라는 분석이다.

정치권 실언이 불길에 기름을 붓다

온라인 설전이 가열되던 시점에 공직자의 부적절한 발언까지 불길에 합류했다. 지난 2월 4일, 광주·전남 행정통합 타운홀미팅에서 김희수 진도군수는 인구소멸 대응책을 묻는 질문에 "스리랑카나 베트남 쪽 젊은 처녀를 수입해 농촌 총각 장가도 보내야 한다"고 답했다.

공개 행사장에서 나온 이 한마디는 즉각 파장을 일으켰다. 주한 베트남 대사관이 공식 서한으로 유감을 표명했고, 현지 언론은 여성을 인구 문제의 수입 자원으로 취급하는 인식 자체를 정면 비판했다. 김 군수와 전남도가 잇따라 사과문을 냈지만 이미 베트남 SNS에서 널리 확산된 뒤였다. 팬덤 갈등으로 시작된 반한 정서에 공직자의 언행이 포개지면서, 동남아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이를 개인의 실언이 아닌 한국 사회가 동남아를 바라보는 민낯으로 읽는 시선이 굳어졌다.

여기에 이재명 대통령의 행보도 겹쳤다. 1월 30일, 이 대통령은 자신의 엑스(X)에 캄보디아 내 온라인 사기 조직 단속 성과를 알리는 기사를 공유하며 "한국인을 건들면 패가망신, 빈말 같습니까? 대한민국은 한다면 합니다"라는 문구를 크메르어와 함께 병기했다. 범죄 조직을 향한 경고 메시지였지만, 캄보디아 현지에서는 국가 전체를 범죄 집단으로 낙인찍는 듯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캄보디아 외교부가 주재 한국 대사를 불러 크메르어 병기의 배경과 의도를 공식 문의했고, 게시물은 이후 조용히 삭제됐다. 청와대는 "충분히 홍보됐다고 판단해 삭제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현지 언론은 캄보디아 시민들의 불쾌감을 상세히 보도했다. 진도군수 발언에 이어 대통령의 SNS 게시물까지 잇따라 도마에 오르면서, 동남아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태를 팬덤 간 충돌이 아닌 한국 사회 전반에 내재된 우월 의식의 연쇄 표출로 읽는 시각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SEAbling의 탄생—동남아시아는 연대 중이다

이번 사태에서 주목할 지점은 동남아시아 누리꾼들이 연대하는 방식이다. '#SEAbling'은 동남아시아권(Southeast Asia)과 형제자매를 의미하는 단어를 조합한 표현으로, 전년도 인도네시아에서 불거진 노동권 시위를 계기로 주변국들이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온라인 결집 기호다. 이 표현이 이번 반한 정서 확산 국면에서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인도네시아 최대 일간지 꼼파스(KOMPAS)는 2월 12일 이 사태를 단독 기사로 다루며 양측 갈등의 구조를 심층 분석했다. 영국과 인도의 주요 매체들도 가세해 각각 '플랫폼 알고리즘이 부른 국가 간 감정전'이라는 관점과 '케이팝 산업의 글로벌 책임론'이라는 각도에서 조명했다. 동남아 팬들이 한류 콘텐츠의 수동적 소비자에서 벗어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로 전환했다는 시각도 제시됐다.

삼성부터 올리브영까지—불매운동이 현실화되고 있다

감정의 파고는 실물 경제로도 번지고 있다. 동남아시아 SNS에는 한국 제품 구매를 거부하자는 취지의 포스터와 실천 인증이 동시다발로 올라오고 있다. 스마트폰을 중국 브랜드로 교체했다거나 한국 드라마 시청을 끊겠다는 선언이 줄을 잇고, 일부 인도네시아 누리꾼들은 케이팝 굿즈를 파기하는 영상을 직접 게시하며 "우리의 정체성은 절대 부끄럽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일시적 감정 표출에 그칠지, 실제 소비 지형의 변화로 이어질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위기감을 뒷받침하는 맥락은 분명히 존재한다. 전년도 방한 외래 관광객은 통계 집계 이래 최고치를 갈아치웠으며 동남아 비중이 그 성장의 핵심 동력 중 하나였다. 한국 수출 당국의 분석에 따르면, 한류 콘텐츠가 해외에서 존재감을 높일수록 뷰티·식품·전자기기 등 연관 소비재 수출이 콘텐츠 수출 증가분을 훌쩍 웃도는 규모로 동반 성장하는 패턴이 확인된다. 온라인에서 퍼진 혐오 표현 하나가 이 구조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뜻이다.

쌓여온 우월의식, 이번이 폭발의 계기였을 뿐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돌발 사고가 아닌 예고된 충돌로 본다. 케이팝의 세계적 팽창과 국내 동남아 이주 노동자 급증이 교차하는 동안, 한국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가 앞서가는 나라'라는 의식이 조용히 축적돼왔다는 것이다. 

물론 동남아시아 현지에서도 온라인 극단론에 거리를 두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소셜미디어(SNS) 알고리즘이 자극적 콘텐츠를 증폭시키는 구조적 특성상 소수의 혐오 발언이 실제보다 훨씬 크게 보일 수 있으며, 온라인 여론이 현지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케이팝 산업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온라인 소음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K팝 업계 관계자는 "KPOP 발전과 역행하는 퇴행적 팬덤 문화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특정 아이돌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수준이었지만 어느새 그 안에 권력 계층이 생기고,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여기며 비난을 퍼붓는 '정치 팬덤' 같은 모습도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익명의 뒤에 숨어 상대방 팬덤이나 팬덤 내 누군가를 깎아 내리는 행위, 소위 역바이럴 행위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는 게 현재 자화상이다. 국내 커뮤니티에서 늘상 벌어지고 있었지만 K-POP 산업의 주 소비층인 팬덤의 유지를 위해 아티스트, 기획사, 언론 모두 침묵하던 불편한 진실이 해외로 전선이 확대되다 실체를 드러낸 것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역바이럴(Reverse Viral)은 경쟁사나 특정 대상의 이미지와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온라인상에서 허위 사실, 비방글, 조작된 후기 등 부정적인 정보를 의도적으로 유포하는 행위를 뜻한다. 

대포 카메라 한 대가 쏘아 올린 공은, 결국 케이팝이 세계와 맺어온 관계의 민낯을 드러냈다. 한류가 뿌리내린 곳에는 그 콘텐츠를 사랑해온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이제 무시당할 의사가 없다. 그 목소리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한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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