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자는 수돗물 마시고 가난하면 병생수 마실까 [.txt]
플라스틱 생수에 의존하는 악순환 밝혀
“물탱크·보급로 확보… 인프라 투자해야”

2025년 9월, 최악의 가뭄으로 재난이 선포된 강릉에 기부의 손길이 쏟아졌다. 가뭄 때 다른 지자체와 기업이 강릉에 보낸 플라스틱 생수 물량은 총 540만병이 넘었다. 대규모 플라스틱 페트병 쓰레기가 산처럼 쌓였다. 플라스틱 생수는 재난 시대의 필요악인가?
미국의 사례를 보자. 2014~15년 캘리포니아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병입생수 회사가 지하수를 퍼 올리고 물을 되팔아 논란이 됐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2014년 이후 미시간주 플린트에서 벌어진 ‘납 수돗물 사태’였다. 역사상 최악의 공중보건 참사로 기록된 이때, 9만5000명의 주민 대부분이 몇년 동안 하루 네시간 줄을 서며 병입생수로 생활했다. 주 정부는 2018년까지 이곳에 수억개의 생수병을 보냈는데, 모두 네슬레 생수였다. 네슬레는 플린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지하수를 뽑아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망할 파이프와 인프라를 고치란 말이에요. 우리가 이 생수에 목을 맬 필요가 없게요.”

미국 포틀랜드 주립대 사회학 교수 대니얼 재피가 2023년 펴낸 ‘언보틀드’는 ‘물 정의’ 문제를 치밀하게 분석한 대작으로, 2010년부터 10년 동안 연구한 결과를 담았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물을 둘러싼 투쟁’을 쫓으며 병입생수라는 ‘상품’이 일으킨 악영향을 광범위하게 분석했다. 플라스틱 병입생수의 사회적이고도 환경적인 해악을 젠더·지역·계급의 문제와 연결해 심층적으로 접근하며 대안을 찾는다.
병입생수가 처음 탄생한 건 로마 제국 시대였다. 유럽에선 순례자, 부자들이 의료용이나 영적인 용도로 특정한 물을 선호했고 그 물을 병에 담아 판매했다. 그중 하나가 ‘페리에’였다. 19세기 병입생수는 유럽과 미국에서 도시의 물 공급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90년대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면서 플라스틱 사용이 폭증했고 ‘스타일, 맛, 건강, 수분 섭취’라는 네가지 요인이 병입생수의 확산을 도왔다. 오랫동안 일부 소비자가 사 먹던 병입생수는 불과 40년 만에 3000억 달러 규모의 글로벌 소비재가 되었다. 병입생수를 만드는 ‘빅4’ 글로벌 회사 중 다논과 네슬레는 주로 용천수와 지하수를, 펩시와 코카콜라는 거의 전적으로 수돗물을 재정수한 정제수를 판다.

‘상품’인 병입생수가 일반화하면서 ‘공공재’로서 수돗물 관리가 미흡해졌다. 공공 음수대가 사라졌고, 당국이 음수대를 설치·관리해야 할 책임도 줄었다. 병입생수는 대체로 규제가 느슨했으며 오염과 리콜도 선명하지 않았다. 에스트로겐 등 호르몬을 모방하는 화학물질 비스페놀에이(A), 프탈레이트 등에 대한 우려가 높음에도 거의 모든 일회용 물병은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로 제조된다. 플라스틱 생수병의 프탈레이트 수치가 유리병보다 평균 12배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소득에 따른 물 사용을 살펴보니, 예상과 달리 소득이 높은 계층은 수돗물을 더 많이 사용했고 병입생수 소비는 오히려 소득이 낮은 계층에서 많았다. 안전한 수돗물이 없거나, 지하수가 오염된 지역에 유색인종과 선주민, 빈곤층이 거주하기 때문이다. “병입생수 소비와 가구 소득의 관계는 인종, 민족, 계층에 따른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과 겹치며 그 불평등을 한층 더 강화한다”고 저자는 밝힌다.

문제는 플라스틱 생수에 의존하는 악순환에 있다. 병입생수 산업이 발달할수록 사 먹는 물은 안전하고 수돗물은 더럽다는 두려움이 강화된다. 이 불신은 공공 인프라 개선을 위한 투자 압력을 낮추며, 깨끗한 물이 공급되지 못하게 한다. 병입생수 구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끈질기게 싸워서 이뤄낸 성공 사례들이 있다. 물 사냥꾼들로부터 물을 지키고 감시해 온 주민, 환경단체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2021년 2월 네슬레는 북미 병입생수 사업부 전체를 매각했다.
저자는 병입생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도시의 수돗물을 영리 목적으로 병에 넣는 행위를 금지하고, 단계적으로 생수 제조와 판매를 중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상상황이 되더라도 병입생수가 아니라 대용량 물탱크와 물 보급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생수에 의존할 가능성이 없었다면 대용량 물 공급용 물류와 장비는 진즉에 잘 갖추어졌을 것이다.” 공공 식수에, 수도 시스템에, 안전하고 깨끗한 물에 투자하는 것만이 ‘물 파산 시대’에 지속 가능한 삶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2026년 초 한국에서 물과 관련해 가장 뜨거운 싸움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경상남도 산청, 지리산 자락 부근이다. 주민들은 생수업체의 지속적 취수로 30년 사이 마을 우물이 마르고 가정용 지하수가 폐쇄되었으며 나무가 말라 죽고 있다며 최근 생수 공장의 취수 증량을 허가해 준 경상남도에 반발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타운홀미팅’ 때도 문제 제기가 되었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저자는 “모두에게 물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정부의 중요한 의무”라고 말한다. 정의롭고 촘촘하며 섬세한 책이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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