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94.실타래가 풀리면 세상이 아름다워져요-정을섭 뜨개인형 작가

최돈선 2026. 2. 2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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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뜨개로 엮은 정겨운 이야기 모여
알록달록 행복감 스민 세계로 확장
새해 인형 110점 전시 관람객 북적
역사 사건·다정한 관계 사실적 묘사
YWCA총무·홍천군 부녀계장 등 거쳐
민주화 운동 참여·아들 투옥 생활 지원
Y 건물 건립 위한 김밥 판매 사연 입소문
2010년 춘천서 첫 개인전 지역사회 울림
골반 부상 후에도 실·바늘 놓지 않아
▲ 정을섭 작 ‘농부들의 술잔’

2026년 1월 20일.

‘정을섭 할머니 뜨개인형전’이 네 번째로 열렸다. 작년 6월에 열린 ‘91세의 봄’전이 열린 지 불과 6개월 만이다.

놀라운 일은 작년 전시에선 40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는 데 올 새해 벽두엔 무려 110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는 점이다.

춘천시 서면 ‘갤러리 툰’의 넓은 전시장은 하객들로 꽉찼다. 의자에 앉아 관람객을 맞이하는 정을섭 작가의 모습은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내가 정을섭 총무님을 YWCA에서 처음 뵈었던 그 시간부터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머리가 하얗게 세셨다. 하지만 품위와 우아함은 여전했다.

그동안 나는 춘천을 떠나 서울과 인제 시골 등지에서 10년 이상을 보냈었다. 그래서 정을섭 님은 내 마음속에서 시간이 멈춘 채 정 총무님으로 남아 있었다. 정을섭 님이 YWCA 총무였을 때, 나는 그 Y에서 2년동안 문학반을 맡아 주일에 한 번씩 주부들과 함께 공부했다. 작고한 최종남 선생과 함께였다.

당시 정총무 님의 큰아들이 서울대 학생일 때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됐다.

그 후, 어머니와 아들은 바늘과 실이 되어 있었다. 정을섭 님은 환경운동 회장 일도 하면서 민주화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가족에 대한 군사 권력의 압박이 그림자처럼 늘 어른거렸다. 딸 하지희 님이 방송사 시험에 1,2차 합격했어도 신용조회에서 탈락했다. 남편의 사업에도 어떤 힘이 작용하곤 했다. 브레이크가 자주 걸렸다. 그럴 때마다 정 총무님은 주저앉지 않았다. 이 악물고 오뚝이처럼 일어서곤 했다.

이제 나는 이분 정을섭 님에 대한 명칭을 총무님에서 손뜨개 인형작가로 불러야 마땅하다. 그러나 잠시 이분이 걸어온 길을 조금만 더 이야기하고 가야겠다. 이 짤막한 소사를 통해 정을섭 작가의 인품과 작품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천군에서 부녀계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정신장애 여인이 배회한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이미 만삭이 된 여인은 몹시 지쳐 있었다. 더럽다며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정을섭 님은 여인을 집으로 데려와 물을 데워 따뜻하게 몸을 씻겼다. 여인은 며칠 동안 먹고 자고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정을섭 님이 춘천으로 오고난 뒤 여인의 소식은 끊겨 버렸다. 이 1970년 초 그 아련한 풍경은 정을섭 작가의 마음속에 늘 흑백의 필름으로 남아 있다.
▲ 정을섭 뜨개작가와 정을섭 작가의 뜨개인형들

공무원 생활을 접은 후 1980년 YWCA 총무 일을 맡았다. 직원은 임시로 고용한 한 명뿐이었다. Y는 작은 건물 한 채를 빌려서 운영할 정도로 가난했다.

어느 날이다. 점심 무렵, 정을섭 총무는 자전거를 몰고 골목을 오르내렸다. 근처 관공서나 신문사, 회사, 은행 등 을 찾아다니며 그날 새벽에 만든 김밥을 팔기 시작했다. YWCA 건물을 짓고 싶었다.

김밥 몇 줄 판다고 그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갸웃했지만 정을섭 총무는 일 년 내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가파른 데서 넘어지기가 수십 번이었다. 저녁이면 상처투성이의 다리에다 붉은 약 바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이듬해 현충일이 되자 정총무는 우두산 현충탑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참배객들이 많았다. 김밥은 잘 팔렸다. 힘이 들었는지 끝나고 돌아오다 가파른 곳에서 그만 또 넘어지고 말았다. 드러난 상처투성이의 종아리를 목격한 사람들이 그걸 보고 매우 놀랐다. 당시 성기방 전 부지사도 그 자리에 있었다. 후에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사연이 전해졌고 그로부터 정을섭 님의 기금 마련을 위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지금은 칠전동에 새로운 YWCA가 번듯하게 들어서 있다. 1980년대는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가슴을 치는 고통도 찾아왔다. 큰아들의 투옥은 일생에 겪은 일 중 가장 큰 천둥이었다. 서울 영등포구치소로 아들 면회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막차로 돌아올 때 차창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졌다. 거기에 아들의 수척한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지곤 했다. 그 얼굴을 엄마는 가녀린 손을 들어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먼 옛날 손뜨개로 목도리를 만들고 스웨터를 만들어 입히던 그 손길이었다. 그 손에 차가운 유리창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괜찮다. 괜찮다. 내가 이제 따스한 실타래를 풀어줄게.

2010년 춘천에서 첫 뜨개인형 개인전이 열렸다. 그해가 정을섭 님의 나이 76세 때였다. 100여점의 알록달록한 손뜨개 인형들은 세간에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인터뷰가 쇄도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을섭 님의 손뜨개 인형은 춘천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일게 했다.

그 후 6년 뒤인 2016년 82세가 되자 70점의 인형 작품 이 춘천시립도서관에 전시되었다. ‘뜨개인형의 춘천나들이전’은 아이들과 엄마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정을섭 작가의 인형엔 따스함이 감돌았다. 그 속엔 속삭이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저마다 이야기를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매력이 느껴졌다. 단순하지만 늘 새롭고 즐거웠다. 보면 볼수록, 만지면 만질수록.

모두가 정겨웠고, 누구에게나 저절로 인사하고 싶어졌다. 정을섭 할머니 고마워요.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는 낙상으로 골반을 다치고 말았 다. 긴 수술을 끝내고 난 뒤 재활치료를 오래 견뎌야 했다. 이제는 혼자서 화장실 출입은 가능해졌지만, 일상적인 거동은 불가능한 처지가 되었다.

딸 집에 거주하면서 정을섭 작가는 혼자서 곰곰 생각했다. 그래 머리와 손은 아직 쓸만해. 그로부터 손뜨개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허태수 목사가 건네준 필사노트도 매일매일 썼다. 무엇보다 딸네 식구들이 고마웠다. 손주들도 종종 들러서 같이 놀아주었고, 무슨 전시회가 있으면 아들 내외가 찾아와 나들이를 함께 하곤 했다. 가족의 힘이 아닐 수 없었다. 실타래가 풀리듯 연대의 힘이 만들어준 생명의 끈이 푸르게 푸르게 이어져 있었다. 가슴 벅차도록 행복했다.

정을섭 작가의 방을 찾았을 때 나는 그 방에서 그런 행복감이 고요히 스며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대 곁에 놓인 색색의 실뭉치들, 대바늘들이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을곳에 있었다.

오늘도 한 점 인형이 눈부시게 탄생했어요. 딸 하지희 님이 내게 전한 말이었다. 하루에 한 점!

2026년 새해 전시장 인형은 단순한 놀이 인형에서 역사적 사건과 이웃 간의 다정한 관계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유관순의 3.1만세, 농부들의 술잔 나눔, 아기 업은 아낙네들 이야기, 클래식 음악 연주회, 소양강 처녀, 밀레의 만종, 심봉사와 심청이, 오토바이 타고 가는 멋진 청년 등등. 놀랍도록 인형의 영역이 확장되고 깊어져 있었다.

그중 나는 한 가족이 모여서 사진을 찍는 인형들에 오래 머물렀다.

정을섭 작가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그 장면에서 나는 작가가 꿈꾸는 세계가 앞으로 더욱 따뜻해지고 더욱 리얼해지고 더욱 깊어지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나는 문득 정을섭 작가의 목소리가 그 자리에서 아련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숨결이 느껴지는구나. 그럼 그럼. 그 애의 손을 잡아야지. 아주 살그머니.<끝> 최돈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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