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北 찬양하며 홍차 마시던 러 대사

식탁에는 과일과 형형색색 러시아 과자가 가득했다. 지난 11일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마련한 기자 간담회장으로 돌아가 봤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대사는 러시아 외교관의 날을 맞아 “차를 마시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겠다”며 기자들을 불렀다. 공식 회견은 아니지만, 보도를 말리지는 않겠다고 했다. 대사관 건물에는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러시아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간담회 시작 전 기자들은 말했다. “우리를 부른 저의를 모르겠다.”
이유는 곧 분명해졌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모두 발언에서 핵심을 꺼냈다. 그는 마이크도 거추장스럽다며 내려놓고, 러시아어로 적힌 발언문을 직접 읽었다. 가득 차려진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물과 홍차만 연거푸 마셨다. “한러 관계 얘기를 했으니 북러 관계도 말해야겠다”며 “쿠르스크 지역 남부를 해방하는 데 기여한 조선인민군의 위대함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북한군 얘기를 꺼내며 대사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고, 놀란 기자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모두 발언은 사전에 다듬고 본국과 교감한 결과물이다. 한국 기자들을 앉혀 놓고 첫머리부터 북한군의 공헌에 감사를 표한 것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았다.
러시아 대사관은 이후 본지 사설에 항의 공문을 보내왔다. 대사의 발언은 “푸틴 대통령과 라브로프 외무장관에 의해 표명된 러시아 국민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대사의 발언이 국가 차원에서 계산된 메시지였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변함없는 주의와 존중을 가지고 경청할 것이며, 다만 그것이 반드시 동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정중한 표현이지만, 행간을 살펴보면 가시가 들어 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이 어떤 입장을 내놓든 따르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대사관 건물 외벽의 현수막은 우크라이나 전쟁 4주년 행사가 끝난 뒤에야 내려졌다. 한국 정부가 철거를 요청했지만 러시아 측은 “관행”이라며 거부해 왔다. 타국 러시아 대사관 어디에도 이런 현수막은 없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지난해 “2차 세계대전 해방 과정에서 소련의 기여가 있었고, 그것을 한국에 알리겠다”고 했다. 이번 발언은 그 연장선이되, 소재가 과거사에서 현재 진행형인 전쟁으로 바뀌었다.
전쟁 승리를 선언하는 현수막, 북한군 참전에 감사를 표하는 대사. 북극 항로와 남북러를 잇는 철도·가스관 사업을 염두에 둔 한국 정부가 러시아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려는 점을 러시아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식탁 위 과자와 과일은 그대로였고, 겉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대사가 전하러 온 메시지는 처음부터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이날의 해괴한 간담회는 러시아가 그 경계선을 어디쯤으로 보고 있는지 가늠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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