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유럽 만든 중세 ‘배반의 역사’[책과 삶]

서영찬 기자 2026. 2. 2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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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를 깬 자들
매슈 게이브리얼·데이비드 M. 페리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420쪽 | 2만3000원


이 책에서 가장 영화적인 장면은 이렇다. 한밤 어둑한 교회 안으로 황제의 장남과 귀족 일행이 들어온다. 마침 교회 안에 있던 사제는 본능적으로 제단 아래 장막 속으로 숨는다. 숨죽인 채 이들의 대화를 엿듣던 사제는 흠칫 놀란다. 대화 내용은 황제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쿠데타 음모였던 것. 결국 사제는 이내 발각되지만, 발설하지 않겠다고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 후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그는 맹세를 깨고 밤길을 달려 황제의 처소로 가서 쿠데타 모의를 아뢴다.

아들에게 축출당할 뻔한 이 황제는 프랑스어로 샤를 대제, 독일어로 카를 대제라 불리는 카롤루스 마그누스다. 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던 그는 800년 성탄절에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고, 황제에 등극해 카롤루스 제국을 열었다. 이 책은 카롤루스 가문의 분열, 모략, 전쟁을 다룬다. 아버지와 아들이 전장에서 격돌하고, 형제·사촌끼리 칼을 겨눈다. 카롤루스 가문의 딸들과 아내들도 여러 세대에 걸쳐 대결 정치 한가운데에서 힘을 발휘했다. 카롤루스의 손자인 삼형제가 제국의 패권을 놓고 841년 격돌한 퐁트누아 전투에서 배반극은 정점에 달한다.

책에서 말하는 ‘맹세’란 신에 대한 맹세, 가문에 대한 복종 선서, 아버지에 대한 충성 서약 등을 가리킨다. 그래서 ‘맹세를 깬 자들’은 곧 배신자, 배반자이다. 책은 카롤루스 황제 가문을 무대로 왕좌를 둘러싼 배반의 정치 드라마를 그린다. 이들이 신뢰를 깨는 모습에서 권력의 속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중세시대의 전투라고 하면 유혈과 떼죽음이 기본값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은 달랐다. 병사들이 총집결해서 싸우는 경우는 드물었고, 싸워도 대개 공격하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퐁트누아 전투가 이런 전투 관념을 깼다. 무참한 대학살극이 펼쳐진 것이다. 퐁트누아 전투의 결과물인 베르됭 조약으로 삼형제는 지금의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벨기에 일대를 나눠 가졌다. 오늘날의 유럽 지도는 그때 그려졌다.

서영찬 선임기자 akira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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