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기획] 잊힌 영웅‘우장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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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7주년을 맞아 기호일보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에 묻힌 고 우장춘 박사의 삶을 재조명한다. 이런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친일파 후손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속죄의 길을 걸은 고 우장춘 박사의 삶을 통해 역사적 화해의 길을 찾아봤다.
우리나라 농업의 기틀을 세운 성자로 추앙받은 우장춘 박사는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짊어졌음에도, 조국의 농업 근대화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역사적 화해와 속죄의 상징이 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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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7주년을 맞아 기호일보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에 묻힌 고 우장춘 박사의 삶을 재조명한다. 끊이지 않는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 찾기 소송을 지켜보면서 과거청산과 역사적 단죄를 되새기게 된다. 이런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친일파 후손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속죄의 길을 걸은 고 우장춘 박사의 삶을 통해 역사적 화해의 길을 찾아봤다. <편집자 주>

일본에서 태어나 세계적 유전학자로 성공했던 고 우장춘 박사가 1950년 3월 한국행을 택하면서 했던 말이라고 전해진다. 우장춘 박사는 1898년 일본 동경에서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실록 등 역사사료에 따르면 1895년 당시 훈련대 2대대장인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을미사변에 가담한 친일파였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1903년 고영근에게 암살당했다.
우 박사는 빈곤과 차별 속에서 일본 도쿄제국대학 농학분야 실과에 진학했다.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해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종의 합성이론'을 증명하면서 세계적인 유전학자로 성공해 안정적인 삶을 보장 받았다.
그런데도 우 박사는 친일파 후손이란 낙인에도 불구하고 한국행을 택한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1950년 3월 한국으로 귀국한 우 박사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 후 전국 각지 농업시험장을 시찰한 후 우량 채소 고정 품종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는 김장 채소(배추, 무)의 우량 종자를 개발·보급해 식량난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병이 없는 씨감자 원종도 생산·보급했다.
감귤류 생산 적지를 제주도로 선정해 감귤 생산 기반을 확립했다. 원예시험장 내 화훼과를 두고 화훼산업을 육성하는 기틀도 마련했다.
우리나라 농업의 기틀을 세운 성자로 추앙받은 우장춘 박사는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짊어졌음에도, 조국의 농업 근대화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역사적 화해와 속죄의 상징이 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은 지 3일 후에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생을 조국에 다 바쳤다. 우 박사는 지금은 수원시 권선동 서둔동 여기산에 잠들었다. <관련 기사 5면>
역사학계에선 우장춘 박사를 국가에 대한 헌신으로 비극적 가족사를 극복하고 민족의 영웅이 된 과학자 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헌신적인 행보가 갈등보다는 역사적 화해의 표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시모 기자 simo@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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