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여 수 한시에 담았다, 옛 문인들의 맛있는 인생예찬

박현주 책칼럼니스트 2026. 2. 26. 19:23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겨자즙에 저민 생선을 다져 넣고/ 초에 절인 생강을 고추장에 넣었네./ 보리밥이 비록 거칠어도/ 부드러운 감칠맛이 비길 데가 없네./ 상추 여러 장을 포개어 싸서/ 입을 쫙 벌리고 우적우적 먹고서/ 배가 불러 북쪽 창 아래 누우면/ 이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지."

김려(1766~1822. 조선 후기 문신)의 한시 '상추'의 일부이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고 단것에 미쳤다고 하든 말든- 강혜선 지음/서유재/2만4000원

- 김려 등 조선시대 지식인 작품
- 일화·배경 함께 쓴 미식 인문서

“겨자즙에 저민 생선을 다져 넣고/ 초에 절인 생강을 고추장에 넣었네./ 보리밥이 비록 거칠어도/ 부드러운 감칠맛이 비길 데가 없네./ 상추 여러 장을 포개어 싸서/ 입을 쫙 벌리고 우적우적 먹고서/ 배가 불러 북쪽 창 아래 누우면/ 이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지.”

‘나를 보고 단것에 미쳤다고 하든 말든’에 수록된 일러스트. 서유재 제공


김려(1766~1822. 조선 후기 문신)의 한시 ‘상추’의 일부이다. 김려는 연이은 유배 생활 끝에 한양으로 돌아와, 1811년에 친구가 마련해 준 한양 삼청동 셋집 텃밭에 채소를 직접 심어 먹었다. 그러고는 채소마다 시를 읊었다. ‘여러 가지 채소 오언고시 10운 19수’ 연작시다. 특히 쌈을 즐겨 상추와 곰취를 두고 쓴 시는 보는 사람마저 군침이 돌게 한다.

“붉은 고추장은 윤기가 잘잘/ 햅쌀 하얀 밥은 따끈따끈/ 거위알처럼 여러 겹 싸서/ 입을 벌리고 잘근잘근 씹으면,/ 맑은 향이 폐와 위를 적시며/ 온몸에 난초 창포 향이 스미는 듯./ 고운 빛깔은 향초의 자리를 빼앗고/ 맛난 맛은 배추를 능가하지.” ‘곰취’의 일부이다.

채소마다 시를 읊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맛을 이리도 상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니 흥미롭다. 김려 외에도 많은 선비가 음식에 관한 시와 산문을 썼다.

강혜선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나를 보고 단것에 미쳤다고 하든 말든’은 300여 수 한시로 보는 옛 문인들의 맛있는 인생 예찬이 흘러넘치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 후기 한문학을 전공했고 옛 문인들의 뜻과 정이 담긴 글을 찾아 소개하기를 좋아한다. 이번 책은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남긴 음식에 관한 시와 산문을 추려 작품에 담긴 일화와 배경을 함께 풀어 쓴 독특한 미식 인문서이다.

김려 박제가 서거정 정약용 유득공 윤선도 이규보 이색 체제공 등. 100여 명이 남긴 300여 수의 시와 산문들이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진다. 저자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한시를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오감을 자극하는 텍스트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방대한 고문헌 속에서 가장 ‘맛있는 문장’들만 추려 ‘한시 한 상’을 차려냈다. 당대 사회상을 비롯하여 지금은 먹지 않는 재료와 하지 않는 조리법은 물론 한식의 으뜸이라 할 장류, 천연재료, 계절 음식들이 아름다운 한시들과 함께 풍성하게 펼쳐진다.


눈 내리는 긴 겨울밤 아내가 장독에서 꺼내 온 찬 김치 한 보시기와 술 한 잔에 감동하여 밤이 늦도록 정담을 나누고(박은), 먼저 간 누님을 그리워하며 해마다 생일날이면 빚어 주던 만두를 떠올리기도 한다(박제가). 밤중에 달콤한 엿을 혼자 먹다가 “나를 보고 단것에 미쳤다고 하든 말든”이라며 32구의 시를 쓰고(김조순), 가난한 살림에 텃밭을 일구며 오이 가지 호박을 예찬한다(이옥). 맛있는 음식 뒤에 언제나 사람의 이야기가 있음을 말하는 선비들. ‘조선의 먹방’은 맛있고 따듯하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