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신분 넘어 하나로… 영해장터 메운 2000여명의 함성

김영호기자 2026. 2. 2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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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그날의 함성 역사적 현장 <3>영덕
3·18 만세운동 106주년을 맞아 지난해 3월 18일 영해로터리와 3·1 의거탑 일대에서 열린 제38회 영해 3·18독립만세 행진 및 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영덕군 제공
1983년 11월 29일 영해 장날에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해 3·1의거 탑' 영덕군 제공
영덕 지품면 낙평리의 조용한 농촌 마을 길을 따라가다 보면, 1919년 봄날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나라의 운명을 지키려 했던 은밀하고도 위대한 시작점을 만날 수 있다. 화려한 무대도 거대한 조직도 없었지만, 이곳에서 피어난 불씨는 곧 영해 장터의 뜨거운 함성으로 타올랐다. 이는 3월 18일부터 4월 4일까지 6개 면에서 9차례나 이어진, 지역 사회가 뜻을 모아 준비한 조직적 항쟁이었다. 3.1절을 앞둔 지금,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옷깃을 여미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겨본다.
1919년 영해 3·18만세운동의 막후 구심점이 됐던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구세군교회의 현재 모습. 사진=영덕군 제공.
▲낙평동교회, 준비의 중심지

영덕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는 사람은 기독교인 김세영이다. 그는 지품면 낙평동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의 도움으로 평양 신학교 유학길에 올랐다가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던 3·1독립만세운동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던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 그리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눈앞에서 본 그는 더 이상 유학을 이어갈 수 없었다. 김세영은 결국 학업을 단념하고 고향 영덕으로 돌아온다. 그에게 서울의 봄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할 시대의 명령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마을의 작은 교회였다. 지품면 낙평동에 자리한 낙평동교회. 이곳은 당시 낙평리 지역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소식을 나누고 뜻을 모으던 공간이었다.

1919년 3월 12일, 김세영은 이 교회에서 구세군 참위 권태원을 만나 서울에서 직접 보고 들은 만세운동의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그리고 영덕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다.

권태원은 그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역할을 나누고, 사람을 모으고, 시위 시점과 방식을 논의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일제의 감시가 일상이던 시기, 이 작은 교회 안에서 오간 대화는 단순한 분노나 탄식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결심이었다. 낙평동 사람 가운데 이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인물로는 지품면 낙평동 북장로파 영수였던 김혁동이 있다. 그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 조직을 정비하며 만세운동 준비에 적극 나섰다.

2003년 12월 30일 영해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해 3·18만세운동 기념탑'. 영덕군 제공
▲영해 장날 2000명 군중 만세운동 폭발

이와 함께 이상화는 3월 18일 영해 장날, 정규하, 남효직 등과 함께 2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또 다른 인물 김응조는 3·1운동 당시 서울성서학원 학생 대표로 서랍골공원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문을 지니고 고향으로 돌아와 영덕 지역 만세운동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낙평동을 중심으로 모인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배경과 삶의 자리를 갖고 있었지만,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 앞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엮였다.

여기에 영덕 지역의 5대 성씨 유림 문중이 뜻을 함께하면서, 거사는 특정 종교나 집단의 움직임을 넘어 지역사회 전체의 약속으로 확대됐다. 신분과 계층, 종교의 경계는 그날을 향해 하나둘 허물어지며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준비는 무르익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3월 18일. 사람과 물자가 가장 많이 모이는 영해 장날, 억눌려 있던 독립의 염원은 거리 위로 쏟아져 나왔다.

영해 시가지와 장터를 가득 메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온 만세의 외침은, 우발적인 분노가 아니라 낙평리에서부터 차곡차곡 준비된 결단의 결과였다. 영덕의 3·18 만세운동은 그렇게 작은 교회에서 시작된 논의가 장터의 함성으로 이어진 '준비된 항일운동'이었다.

이날의 만세 시위는 곧바로 혹독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 참가자들을 연행했고, 많은 이들이 투옥과 고문, 생계의 붕괴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은 좌절이 아니었다.

영덕의 만세운동은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분명한 증거로 남았고, 이후에도 4월 4일까지 군내 여러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지는 불씨가 됐다.

영덕군과 지역사회가 지난 2019년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품면 낙평리에 세운 '3·18 만세운동 발상지 기념비'. 사진=영덕군 제공.

▲오늘의 계승, 영해 3·18 독립만세행진

작은 마을이었던 낙평동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수많은 유공자를 배출한 고장이 됐다. 지품면 낙평동은 규모로 보면 평범한 농촌이었지만, 그 안에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 있었다.

이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영덕군과 지역사회는 지난 2019년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에 즈음해 이곳 낙평리에 '3·18 만세운동 발상지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울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의 흐름이 어떻게 영덕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낙평동교회를 중심으로 준비된 만세운동이 영해 장터의 함성으로 폭발했는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영덕은 그날의 외침을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매년 3월 18일 오전 10시, 영해 시가지에서는 '영해 3·18 독립만세행진 및 추념식'이 열린다. 행사는 영해로터리 3·18기념탑에서 출발해 3·18의거탑 일원까지 이어진다.

이 행사는 1919년 3월, 영해 시가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그 의미를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아울러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을 지역민 모두가 함께 기억하고 되새기는 화합의 장으로 만들고 '애국충절의 고장 영덕'을 널리 알리는 역사문화축제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운영 방향 또한 분명하다. 영해 3·18 만세운동의 역사성을 더욱 드높여 영덕을 대표하는 역사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고, 대동단결과 화합의 의미를 오늘의 지역사회 속에서 다시 되살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행사는 영덕군이 주최하고, 영해3.18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한다. 지역의 항일 역사를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문화자산으로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25년 3월 18일에 열린 '영해 3.18 독립만세 행진 및 추념식'. 영덕군 제공
2025년 3월 18일에 열린 '영해 3.18 독립만세 행진 및 추념식'. 영덕군 제공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항일정신

낙평동교회의 작은 방에서 시작된 조심스러운 논의, 그리고 영해 장터를 가득 채운 만세의 함성. 3·1절을 맞아 다시 돌아보는 영덕의 독립운동은 위대한 인물 몇 사람의 이름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역사다. 평범한 농민과 상인, 종교인과 유림, 학생과 청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선택을 했기에 가능했던 공동의 기억이다.

지품면 낙평리에서 타오른 항일구국의 불씨는 오늘도 영해 시가지에서 이어지는 행진과 추념 속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그 불씨는 영덕이라는 지역이 지켜 온 역사와 정체성의 중심에서 앞으로도 계속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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