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바라지만…러시아, 돈바스 내준대도 또 전쟁 일으킬 것”


토요일인 7일(현지시각) 낮 우크라이나 키이우 드니프로강가의 눈밭에선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EDM)이 둥둥 울렸다. 어른들은 종아리 높이까지 쌓인 눈에 푹푹 빠지면서도 박자에 몸을 흔들고, 아이들은 강둑 비탈에서 썰매 삼매경이었다. 시민들이 전쟁의 피로와 공포를 잊으려 비정기적으로 꾸리는 야외 행사였다.
18살 대학 새내기 마르하리타는 한겨레에 “(폭격으로) 아파트 난방·전기가 1달째 끊겨 집안 온도계가 영하 7도를 가리켰다. 전쟁 속에 사는 게 비참하다”면서도 “우울에만 빠져있을 순 없다. 이웃을 만나고 기운을 추스르러 나왔다”고 웃어 보였다.
이 풍경은 한겨레가 1∼9일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시민들의 마음 상태를 요약한다. 전쟁 4년 동안 우크라이나 쪽 추정 사상자가 60만명에 이르면서(러시아는 120만명) 전쟁터에 친지를 잃지 않은 이가 드물고,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 폭격으로 정전·단수는 일상이 됐다. 행인과 군인 모두 “전쟁 없이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더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평화를 절실히 원하지만, ‘땅을 포기하면 종전하겠다’는 러시아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다고 했다.

전쟁 고통 크지만, 동요 드물어
31살 경영 컨설턴트 올하는 “전쟁 전부터 이런 문화였던 건 아니다. 전쟁에 힘 써야 할 정부가 이런 데 행정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사람들이 (공공질서에) 신경을 쓰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시민들은 우크라이나 사회가 이런 단합을 바탕으로 항전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대체로 내다봤다. 8일 퇴근 후 키이우 도심 성당에 미사를 보러 온 30대 남성 군인은 “러시아는 전기와 난방을 끊으면 전쟁에 지친 이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킬 거라 기대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며 “사람들은 서로에게 화를 쏟아내지 않는다. 러시아에 대한 울분이 커졌을 뿐”이라고 전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주도로 진행 중인 평화 협상엔 큰 기대가 없었다. 테르노필에서 공습으로 집을 잃은 넬랴 코발추크는 “너무 늦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오랜 혈전으로 양쪽 감정의 골이 깊어져 대화로 타협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특히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주) 영유권을 포기하라’는 러시아 쪽 요구에 대해서는 시민들 언성이 높아졌다. 아동권 전문 변호사인 올레나 로즈바도우스카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도시 몇개나 전기 공급만 뺏어간 게 아니다. (부모를 잃거나 실향민 된) 어린이 수백만명의 삶이 전쟁으로 영영 바뀌어버렸다”며 “가해자인 러시아가 값을 치러야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과하는 법은 없다”고 했다.

“양보해도 전쟁 안 끝날 것”
지난 11∼15일엔 우크라이나군이 닷새 간 201㎢를 탈환했는데, 이는 러시아군이 지난해 12월 한달 간 점령한 면적과 같았다. 이달 초 미국 스페이스엑스가 러시아군의 스타링크(군집위성 통신망) 접속을 차단해 러시아군 지휘 통신이 어려워진 영향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방어 중인 요충지를 ‘공짜로’ 넘길 순 없다는 게 우크라이나인들 생각이다.
차량 정비병으로 복무하는 한 군인은 “좌석이 피범벅 돼 부대로 돌아온 트럭들을 볼 때마다 괴롭다”면서도 “최근 부대 통신망엔 땅을 수복했다는 전투 보고가 더러 올라온다. 전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 요구를 들어주고 종전해도 상대가 또다시 쳐들어올 거라는 의심 역시 깊다. 시민들은 이 전쟁이 ‘4년 전쟁’이 아니라 10년 넘게 이어진 싸움의 일부라고 본다. 우크라이나가 2014년 2월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친러시아 정부를 끌어내리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무력 점령한 게 충돌의 시작이라는 시각이다. 이어 그해 4월 러시아 지원을 받은 돈바스 반군과 우크라이나군 사이의 전쟁(돈바스 전쟁)이 터졌고, 교전은 2022년 2월 전면전 발발 직전까지 계속됐다.
전쟁의 반복을 막을 국제사회 안전 보장 없이는 항전을 이어가겠다고 시민들은 말했다.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하는 나나는 “러시아는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를 원치 않아 줄곧 주권을 빼앗으려 해왔다. 이번에 양보해도 언젠가 또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리상담가 율랴는 “(무력 침공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국제법이 우크라이나에선 휴짓조각이 돼버렸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평화 협상에서) 강력한 안전 보장을 원한다”고 했다.
시민들은 우크라이나가 전쟁 뒤에도 민주주의 국가로 남기를 희망한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영역본을 읽어 5.18 민주화운동을 안다는 상이군인 미콜라는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유로마이단 혁명 등) 광장에서 공권력 발포에 맞선 끝에 민주주의를 얻어냈고, 이를 자랑스러워한다”며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질 기회가 열려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키이우·테르노필/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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