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넌 용기, 섬의 3·1운동] ① 줄다리기 구호가 ‘독립 만세’로…일제 속인 덕적도 주민들

안지섭 기자 2026. 2. 26. 18:3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1919년 4월 9일 인천 옹진군 덕적도 진리 해변에서 섬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다. 인천일보가 취재한 덕적초중고등학교 일대와 3·1운동 기념공원 사진을 AI 이미지 생성기 '나노 바나나(Nano Banana)'에 넣어 제작했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고, 100여년 전 만세운동의 함성이 서린 모습을 강조하고자 했다./양민섭 PD sub@incheonilbo.com

"관광객들이 오면 '여기도 3·1운동을 했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

1919년 경성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열기가 전국 곳곳으로 퍼져 나갈 무렵, 인천에서 약 50㎞ 떨어진 덕적도에 독립운동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심경은 복잡했다. 육지는 장날이나 행사가 있어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지만, 섬은 그런 기회가 없었다. 여기에 바다로 둘러싸인 섬의 지형적 특성상 포위망이 좁혀지면 탈출하기 어렵다는 위험 부담도 있었다.

그럼에도 독립운동가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고향에 육지 곳곳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덕적도 주민들은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3·1운동기념공원을 오가며 그날을 돌이켜본다. 매년 주민들은 이곳에서 옛날 의복을 입고 연극 공연을 한다.

취재진과 공원을 함께 돌아보던 권순학 덕적면 주민자치회장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배움에서 출발했고, 누구보다 빨랐고, 똘똘 뭉쳤습니다. 창의적인 방식으로 비폭력 운동으로 평화를 외쳤어요."

▲사립학교 교사들, 목숨 걸고 독립선언서 들여오다

덕적도 독립운동 준비는 4월 초에 시작됐다. 3·1운동의 여파로 항구를 비롯한 길목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상황이었다.

서울 성경학교에 다니던 이동응(39)은 고향 회룡골(현 서포2리)로 돌아오며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 1부를 숨겨 들여왔고, 그의 조카 이재관(23)에게 전달했다.

당시 덕적도에는 명덕학교와 합일학교, 명신학교 등 사립학교가 속속 설립돼 교육열이 높았다. 섬의 교육열은 애국·반일 의식을 키우는 토대가 됐다. 덕적도에 가면 '글 아는 체하지말고 풍월을 짓는체하지 말라'는 말이 육지에서도 돌 정도였다.

이재관은 명덕학교 출신으로 합일학교 교사였다. 그는 선언서를 접한 뒤 뜻을 함께할 동지들을 모았다. 그리고 격려문을 작성해 돌렸다. '莫非王民, 莫非王土(막비왕민, 막비왕토):임금의 신하 아닌 이 없고,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다'고 적으며, 굳은 결의를 다졌다. 당시 국내에는 고종이 일제에 독살됐다는 의혹이 퍼지던 시기였다.

비슷한 시기 김포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명덕학교 교사 임용우(35)도 감시를 피해 덕적도로 들어왔다. 그는 이재관의 격려문을 보고 "큰 수고를 했다"고 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섬은 더 이상 고립된 공간이 아니었다. 독립을 바라는 염원이 바닷길을 타고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운동회로 위장한 거사…섬 전체로 번진 만세

관건은 주민을 어떻게 모으느냐였다. 덕적도에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일 만한 장날이 없었다. 여기에 일본 경찰 주재소와 순사도 있었고, 경비정이 덕적 군도를 순찰하고 있어 무턱대고 만세 운동을 벌일 순 없었다.

임용우가 꺼낸 해법은 '춘계대운동회'였다. 각 마을과 학교에 운동회 개최 소식을 알린 뒤, 한자리에 모인 주민들에게 조선의 현실을 알리고 만세를 외치자는 계획이었다.

▲ 100여년 전 만세운동이 있었던 인천 옹진군 덕적도 진리 해변에서 노송들이 묵묵히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듯 서 있다. 권순학 덕적면 주민자치회장이 그날 있었던 운동 과정을 취재진에게 설명하는 모습. /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운동회는 4월 9일 아침 진리 해변에서 열렸다. 현재 덕적초중고교 앞 소나무 숲이 있는 평탄한 해변이다.

당시 모였던 인원은 100~300명이 모인 것으로 전해진다. 아침에는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이 이어졌다. 이날 '시라네(백근)'라는 순사가 경기 안산 대부도 주재소에서 출장 나와 현장을 지켜봤으나 오후 중 자리를 비웠다. 기회는 그때였다.

임용우의 연설이 시작됐고, 이재관이 격려문을 낭독했다. 차경창(19) 등 청년들이 호응했다. 이내 주민들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바닷바람을 가르며 터진 함성은 섬을 뒤덮었다.

만세는 밤 9시까지 북리와 서포리 등 마을로 이어졌고, 국수봉에 봉화도 올랐다고 전해진다. 제자와 함께 운동회에 참석했던 울도의 사숙교사 이인응 역시 섬에 돌아가 만세를 불렀다. 작은 섬의 외침은 인근 섬으로 번져갔다.

▲옥고 치른 지사들…더 밝혀야 할 역사

덕적 독립지사들은 일제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울도에서 난 만세 운동을 일본 경비정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 화근이 됐다. 주모자를 체포한 일경은 배후에 임용우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임용우는 덕적도의 헌병 주재소에서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가혹한 고문으로 항소조차 하지 못하고 한달 뒤인 5월 10일 35세 일기로 끝내 순국했다. 이재관과 차경창도 수업 중 조선인 헌병 보조원에게 끌려가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덕적도에는 당시 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비와 공원이 조성돼 있다. 1979년과 2021년에 각각 마련됐다.

주민들은 자신의 고향에 있는 자랑스러운 기록을 계승·발전시키길 바란다.

김원학 진1리 이장은 "주민이 접할 수 있는 자료가 기념비 문구에 그친다"며 "사료 발굴과 정리, 주민 열람이 가능하도록 관계기관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덕적도는 옹진군에서 유일하게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여는 곳"이라며 "행사 공간이 좁고 화단이 밀집해 관리가 어려워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권순학 주민자치회장은 "선조들의 정신을 바탕으로 주민들이 잘 뭉쳤으면 좋겠다"며 "그때 일제에 대항해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듯이 지금 우리 주민들도 섬에 일어나는 문제에 한 목소리로 단결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현재 덕적도 진리 마을정관 '취지문'에는 이런 문구가 남아 있다. 

"기미년 4월 9일 덕적도 주민이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던 선열의 정기가 서린 이곳은 덕적도 최고의 명산 비조봉과 서해의 푸른 물결이 감도는 곳…"

▲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 있는 3·1운동기념공원 기념비의 양 옆에 당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주민들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박준엽 수습기자 jun010209@incheonilbo.com

/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Copyright © 인천일보 All rights reserved - 무단 전재, 복사,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