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삼국지’ 실제 역사 알리려 3년 걸려 1만7천매 번역”

중국 고전 번역가인 김영문(66)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교열위원이 소설 삼국지의 매력에 빠진 때는 초등 2학년이었다. 짝이 가지고 온 ‘만화 삼국지’가 너무 재밌어 빌려 보려는데 친구들도 서로 보겠다고 했다. 그가 찾은 해법은 구연하듯 자신이 교실에서 직접 친구들에게 읽어주는 것이었다.
“그전에 읽은 ‘콩쥐 팥쥐’나 ‘해님 달님’ 같은 동화와 완전히 다른 스케일인 데다 캐릭터 묘사도 생생하고 그림도 좋았거든요. 정말 푹 빠져 읽었는데 중간에 촉나라 유비 장수인 관우가 죽어버리더군요. 유비 책사인 제갈량도요. 어린 마음에 너무 충격이 컸어요. 우리 편이 죽었으니까요. 역사라는 게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자의식이 그때부터 잠복했던 것 같아요.”
경북대 중문과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올해로 15년째 ‘전업 번역가’다.
중국 명나라 때 풍몽룡이 쓴 대하 역사소설 ‘동주 열국지’(전 6권)를 2015년에 완역했고 4년 뒤엔 이문열 소설로도 널리 알려진 ‘초한지’ 원본으로 명나라 때 작품인 ‘서한연의’(견위 저)를 국내 최초로 완역해 ‘원본 초한지’(전 3권)를 냈다. 동주 열국지는 지금껏 7쇄, 원본 초한지는 9쇄를 찍었다.
앞서 2010년엔 남북조 시대 양나라 소명태자가 편찬한 시문집으로 동아시아 문학 교과서로 꼽히는 ‘문선’을 동료 연구자 넷과 함께 국내 최초로 완역했고, 루쉰 전집 20권 번역에도 참여했다.

최근 그가 ‘배송지 주까지 완역한 결정판’ 부제를 달아 모두 8권으로 옮긴 ‘정사 삼국지’(글항아리)도 국내 처음으로 정식 출판된 책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 유송의 역사학자 배송지(372~451)가 서진 시대 역사학자 진수(233~297)가 지은 ‘정사 삼국지’에 원문에 버금가는 분량의 주를 달아 펴낸 저술로, 중국에서 1003년 처음 판각한 이래 ‘진지배주’(진수 삼국지 배송지 주)로 불리며 정사 삼국지의 가장 일반적인 독서물로 통용됐단다.
“분량 때문에 번역을 포기할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첫 난관은 조조 아들인 위나라 왕 조비가 신하들이 황제 보위에 오르라고 하자 ‘난 덕이 없어 못 하겠다’는 교지를 네 차례나 내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배송지 주였어요. 이 주만 책으로 40쪽 가까이 되고 독해가 까다로운 ‘사륙변려문’(문장 기본 단위를 4자와 6자로 구성해 대구를 이루는 문체)이라 번역을 해야 할지 고심이 많았죠.”
지난 11일 경북 칠곡군 약목면 자택에서 만난 김 위원의 말이다.
그는 200자 원고로 번역문만 모두 1만7천매인 이 책을 옮기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고 했다. 이런 인고의 시간을 독자들이 알아봤을까? 1쇄로 각 권 1500권씩 찍었는데 1권은 벌써 2쇄를 찍었단다.
그는 이번 책 출간의 의미를 두고 “삼국 시대 역사를 다양한 입장에서 비교하고, 생동감 있게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책”이라고 답했다. 위·촉·오 삼국 시대가 배경인 소설 삼국지 마니아를 포함해 그 시절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설명이다.
“진수가 근엄하고 간결한 필치로 기록한 역사에 배송지는 풍부하고 다양한 사료를 인용해 주를 달았어요. 배송지가 주에서 인용한 책만 200권이 훨씬 넘어요. 이 가운데 상당수는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죠.”
그는 배송지 주가 ‘조조의 위 정통론’에 치우친 진수의 시각에 균형을 잡는 역할도 한다고 했다. “배송지는 위 왕 조조가 죽자 조조를 찬양하는 위나라 자료인 ‘위서’와 오나라 사람이 쓴 ‘조만전’을 나란히 인용해 주를 답니다. 조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요. 위서는 조조가 문학에도 뛰어난 영웅호걸이라고 찬양했지만 조만전은 조조가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비열하다고 악평하죠.”
소설 삼국지 팬이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 세부 기록도 풍부하단다. “논란은 있지만 조조의 실제 성이 ‘하후’란 것도 이 책에만 나오죠. 환관의 양자로 들어간 조조의 부친 조숭이 하후씨였다는 거죠. 조조의 부하 장수인 하후돈은 조조와 사촌 사이고요. 조숭이 도겸에 의해 죽음을 맞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요즘 말로 좀 웃픈 대목입니다. 조숭이 도겸에 사로잡히기 전에 먼저 그의 첩을 급히 뚫은 담장 구멍으로 내보내려 했지만 첩의 몸이 비대해 탈출에 실패하면서 다 죽음을 맞았다고 쓰였더군요.”
그는 이번 번역을 통해 위·촉·오 삼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당시 무척 다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배송지 주에는 오나라 정통성을 은연중 드러내는 대목이 많아요. 사실 우리가 소설이나 정사 삼국지를 볼 때는 손권이 강남의 부호로서 호족을 이끌고 세운 오나라에 어디 정통론이 있겠냐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배송지 주에 인용한 오나라 사관 위소의 오서와 저자 미상의 조만전 등에는 오가 천명을 받은 것처럼 기술한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사납고 잔인하고 포악하고 불인(不仁)했다.” 후한의 군웅이자 정치인인 동탁에 대한 진수의 논평이다. 이를 두고 배송지는 동탁의 잔인함을 수긍하면서도 ‘잔인하다고 해놓고 다시 불인하다고 한 것은 의미가 중복된다’고 토를 달았다. 인물평을 최대한 엄정하게 서술하려는 배송지의 자세가 느껴진다.
이번 책에서 만난 인물 중 누가 가장 인상 깊었냐고 하자 그는 황제에게 직간을 서슴지 않았던 문제(조비)의 신하 신비를 먼저 떠올렸다. “문제가 ‘꿩 사냥을 하니 즐겁다’고 하자 신비는 바로 ‘폐하에게는 큰 즐거움이지만 신하들에게는 심한 고통입니다’고 받더군요. 신비는 백성의 고통을 덜려는 자신의 계책을 문제가 외면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황제의 옷자락까지 잡고 설득했어요.”
‘김영문 고전 번역’의 한 특징은 독자의 원문 이해를 돕기 위해 가이드북 성격의 사전을 별도의 책으로 낸다는 점이다. 동주 열국지·원본 초한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따로 낸 사전에는 삼국의 시기별 지도와 등장인물, 지명, 관직 설명과 위 황실 계보도 등이 담겼다. 배송지가 인용한 책 중 지금은 사라진 책 목록과 설명도 달았다. 모두 그가 번역 틈틈이 자료를 찾아 정리했다.
“동주 열국지 번역 때 너무 인물이 많아 따로 정리하지 않으면 제가 잊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작업 도중 인물의 주요 행적을 대학 노트 몇 권에 정리했죠. 책으로 내자고 하니 출판사에서 (사전이 있으면) 독자 주목을 더 받을 수 있겠다고 좋아하더군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중국 고전은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란다. “구당서에는 태종(이세민) 본기가 있습니다. 태종이 고구려에 쳐들어가 안시성에서 패한 이야기나 고종 때 고구려가 멸망한 상황 같은 게 많이 나와요. 당과 삼국 및 통일신라의 교섭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요. 문제는 양이죠. 정사 삼국지보다 다섯배나 많거든요. 하게 된다면 대형 출판사가 나서야겠죠.”
지금껏 중국 고전을 포함해 40여종 약 90권의 책을 번역한 그가 최고로 꼽은 중국 고전 문장은 사마천 사기 ‘백이전’에 나오는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다. 사마천이 ‘하늘의 뜻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묻는 말이다.
경북대 인문대 1학년이던 1980년에 그는 이 문장을 읽고 또래 대학생이 많이 죽은 5·18 비극이 떠올라 큰 충격을 받았단다.
“사마천은 의인인 백이와 숙제는 굶어 죽었고 공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안회는 빈민굴에서 요절했는데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날로 먹은 도척은 천수를 누렸다고 한 뒤 이 말을 합니다. 이는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한 근본 질문입니다. 사마천은 역사 기록을 통해 백이·숙제와 도척의 삶을 비교해 보여주면서 누가 옳은지 물어요. 물론 도척의 삶이 올바르지 않다는 거죠. 이 글을 처음 보고 우리 군인들이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폭도로 매도한 5·18이 겹쳐 보이면서 2천년도 전에 사마천이 이런 것을 간파했다는 생각이 들어 큰 충격을 받았죠. 초2 때 처음 읽은 관우와 제갈량의 죽음도 떠올렸고요.”
덧붙였다. “사마천은 현실이 굉장히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게 많아 기록하지 않으면 반성할 어떤 거울이 없으니 역사의 진상을 그대로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사기를 썼어요. 이게 역사를 쓰는 모든 사람의 입장이 아닐까요. 제가 이번 책을 번역한 것도 같은 생각이죠.”

그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문장은 루쉰이 헝가리 시인 산도르 페퇴피(1823~49)의 시 구절을 인용한 “절망이 허망하기란 희망과 같다”이다.
“절망이 허망한 것 같지만 절망에서 끝나지 않고 희망이 잠복해 있다는 거죠. 루쉰 소설 고향에 나오는 ‘땅 위에 본래 길이란 없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서 생겼다’는 말과도 통해요. 소설 삼국지의 정신과도 맞닿죠. 소설은 촉 정통론을 내세우잖아요. 이는 작자인 나관중의 기호가 아니라 민중의 염원이 녹아 있어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조조는 권력자 집안 출신이고 손권은 방대한 땅을 가진 강남의 호족 출신이지만 유비는 황실 후예라고 해도 완전히 몰락한 집안 출신으로 돗자리 장사나 하는 사람이었어요. 제갈량은 농사를 지었고 관우 장비 조자룡도 출신을 잘 몰라요. 대체로 평범한 이웃들이었죠. 우리 이웃이 대의 하나로 뭉쳐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데 결국 실패하잖아요. 이 실패가 절망에 그치지 않고 민중 속에서 계속 회자하면서 소설 삼국지로 이어진 거죠. 그때 그 멋진 사람들이 좋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 결국 실패했지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삼국지 소설에 담겼죠. 저는 이 정신이 루쉰의 꿈과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오늘날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정사 삼국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과 사건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삶을 비춰볼 수 있어요. 인간의 생활 조건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의 삶을 꿰뚫는 보편성이란 게 있거든요. 그 보편성을 고전에서 볼 수 있죠.”
그는 이어 고전을 공부하면서 불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고전에는 올바른 말과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가득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고전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독재를 찬양하고 국민에게 총을 겨눈 사람을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번역가에게는 외국어 못지않게 한국어 실력도 요구되는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한국어 실력을 키우려고 늘 한국 작가들의 책을 옆에 두고 읽습니다. 지금은 한강과 김훈 작가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지금 제 번역보다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하고 싶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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