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삶] '왕과 사는 남자'와 단종의 죽음, 세·네 가지 버전

박은희 2026. 2. 26. 18:0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박은희 연출가·전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

설날 늦은 밤에 조카 내외와 한 살, 세 살 아기 둘을 재워 놓고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요즘 제작비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침체했던 한국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러 간 것이었다. 필자는 어떤 한 가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감독의 잘 알려진 단종과 엄흥도 얘기의 사극 연출 버전이 궁금해서 선뜻 따라 나선 것이다. 조카 내외는 제발 아기들이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한편으로 육아에 시달리는 조카며느리는 시고모와의 한밤중 일탈을 매우 즐거워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해줄 얘기가 있다고 했더니 뭔지 감도 잡히지 않는 종잡을 수 없는 궁금함 마저 기뻐했다.

'역사기록은 승리한 자의 것'이라는 말을 뒷받침하듯 여러 버전의 야사가 존재한다. 영화나 연극의 사극 제작은 내용이나 시대적, 사회적 고증이 필요한데 재미를 주기 위한 연출은 너무 역사 왜곡이 아니면 인정해주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내용 중 엄흥도의 아들이 곤장을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선 전기에는 곤장이 없었다는 것이지만 그 정도는 굳이 따지지 않는다. 단종의 죽음에 관한 기록도 정사와 여러 버전의 야사가 전해지는데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마지막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엄흥도가 단종 죽음 장면에서 야사 기록과 다르게 목을 조이는 줄을 직접 잡아당기게도 하여 극적 효과를 높이게 한 것 등이다. 영화는 감독의 영화적 상상을 보고 듣는 재미가 있었다. 한참 영화적 재미에 빠져 조카가 영화 중간에 자다 깬 아가들 달래러 호출받고 집에 갔다는 걸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필자는 조카며느리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영화관 앞에서 콜택시를 불러 놓고 조카며느리가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던 해 줄 얘기를 전해주었다.

단종과 우리 집안에 얽힌 이야기가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단종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죽임을 당하고 3대 멸족을 당한 사육신 중, 박팽년의 자손만 살아남은 얘기이며, 그 세 가지 버전은 할머니의 버전, 한자 선생님의 버전, 그리고 연출가 고 오태석의 버전이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당시 며느리가 임신하여 배가 부르니 '아들을 낳으면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들을 낳았고 크게 걱정하던 차에 문밖에 이상한 소리 들려 나가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등을 돌려 앉으므로 아기를 안고 호랑이 등에 타게 되니 깊은 산속까지 달려가 내려주고 호랑이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치마폭에 잔돌을 날라다 덮어주어 서낭당을 만들어 주고 숨어 살아 대를 잇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자 선생님에게서 들은 내용은, 박팽년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을 때 집안의 여종도 아기를 낳았는데 다행히도 딸을 낳아서 바꿔치기하여 죽임을 면하고 대구에 있는 외가에서 몰래 노비 신분으로 양육되어 대를 잇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외가에서 현재까지도 육신사 사당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연출가 오태석의 연극 '태'에서는 며느리도 여종도 모두 아들을 낳았는데 여종의 남편이 자신의 아들을 바쳐 희생시키고 대감님 댁의 대를 잇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태'는 역시 연극적 상상이 가미 되어 극적 효과를 높였는데, 갓 아이를 출산한 여종이 남편에게 아들을 빼앗기고 가슴을 드러낸 채 미쳐 날뛰던 장면이 인상 깊었다.

조카며느리는 다양한 추임새를 연발하며 재미있게 들어 주었다. 혹시 내가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박은희의 태'를 정말 공연하게 되면, 네 가지 버전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아이들에게 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러겠다고 찰떡같은 답을 해 준 조카며느리의 기질을 보건대 다섯 번째 버전이 나올는지도 모르겠다.

/박은희 연출가·전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

Copyright © 인천일보 All rights reserved - 무단 전재, 복사,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