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니다] 지친 마음 보듬어준 고향 품, 자연을 오롯이 담아냅니다
치열했던 금융권 떠나 돌아온 고향
10년 기다림 끝에 피워낸 창업의 꿈
“하동서 키운 원재료로 진심을 담아”
지역 농가와 그리는 ‘착한 성공’ 지도

섬진강과 지리산이 만나는 하동군 하동읍. 이른 아침부터 농산물의 진한 향이 스며드는 이 고장 한쪽에 번듯한 간판 하나 없는 소박한 사무실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햇볕을 머금은 토마토와 생강, 갓 따낸 녹차와 딸기 냄새, 그리고 그 원재료를 손수 다듬고 살피며 보낸 한 사람의 땀 냄새가 뒤섞인, 어딘가 따뜻하고 정직한 향기다.
그 공간의 주인, 농업회사법인 자연저장소 차영주(48) 대표는 미소로 맞았다. 서류 더미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선반들 사이에서도 그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아직 간판도 못 달았어요. 지금은 어수선하고 초라하지만, 올 하반기에는 여기에서 소비자들이 우리 제품을 직접 보고 맛볼 수 있는 예쁜 전시·판매장을 꾸미는 게 바람입니다."
수줍은 말이었지만, 진심이 가득했다. 화려한 외형보다 내실을,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고집스러운 '하동 사람'. 차영주 대표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금융권 긴장을 내려놓고, 흙의 정직함을 배우다
그의 뿌리는 하동이다. 이 고장에서 나고 자라 중학교까지 다녔다. 진주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처음 고향을 떠났던 그는 성인이 되고 나서 금융권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뛰어들었다. 숫자와 실적이 지배하는 냉정한 도시의 삶,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직장인의 나날들. 겉으로는 성공이라 불렸지만, 그 이면에는 서서히 깊어지는 피로와 상처가 쌓여갔다.
"직장생활과 사람에 많이 지쳐서 그저 좀 쉬고 싶었어요.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가면 좀 나아질까 싶었던 생각이 컸습니다."
2014년, 그는 그렇게 도망치듯, 혹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향 하동으로 돌아왔다. 부모님 곁에서 쉬고 싶었던 마음이 컸지만, 고향이 건네준 것은 단순한 안식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 이런저런 아르바이트와 하동군청에서 일하며 보낸 나날들. 그 과정에서 그는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다시 서는 법을 배웠다.
가슴 한편에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었다. '나만의 일'을 향한 갈증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이템을 고민하던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곳은 하동군농업기술센터였다. 농산물 가공과 유통의 세계를 처음 접한 그는 고향의 흙이 키워낸 원재료들을 눈앞에서 마주하며 서서히 확신을 굳혀갔다. 그리고 2022년, 그는 '잘 모르는 길'을 향해 무작정 첫발을 내디뎠다.

자연을 담는 저장소, 그 속에 깃든 농심
'자연저장소'. 회사 이름 하나에도 차 대표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나의 패키지 안에 하동의 자연과 원재료가 그대로 담긴다는 의미다. 소비자 입맛을 잡아끄는 자극적인 첨가물 대신 그가 고집하는 것은 원재료 함량을 높이는 일이었다. 토마토, 생강, 녹차, 딸기. 하동과 인근 지역 땅이 길러낸 건강한 재료들이 그의 손을 거쳐 한 팩, 한 병에 오롯이 담긴다.
"내가 먹고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들면 결코 제품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연저장소라는 이름에 맞는 무첨가·무색소·무향료 원칙을 지켰고요, 보존료를 포함한 어떤 첨가물도 없습니다. 원칙을 지키려고 합니다."
'내가 먹고 내 가족이 먹는다.' 이 단순한 문장이야말로 차 대표가 제품을 만드는 모든 과정의 기준이다. 원가를 낮추려고 원재료를 희석하거나, 유통기한을 늘리려고 방부제를 넣는 것은 처음부터 그의 선택지에 없었다. 단기적으로는 손해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원칙이, 그에게는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경쟁력이었다.
그의 고집은 제품을 넘어 지역사회와 연결로 이어진다. 자연저장소가 성장할수록, 이웃 농가들에서 더 많은 원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지역이 살아나는 길이라는 믿음이 그를 움직인다.
"제가 하동에 정착해서 창업한 이유는 우리 지역 농가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함께 혜택을 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청년도 노인도 아닌 나이, 시련 딛고 넘는 문턱
창업의 길이 의지만으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차 대표는 몸으로 겪었다. 공장을 짓고 장비를 들이고 시설을 갖추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훨씬 큰 자금이 들어갔다. 원재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도 매 계절 새로운 전쟁이었다. 그 모든 어려움 위에, 그에게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요즘은 청년 창업 지원은 많은데, 저처럼 45세 이상인 세대는 지원을 받기가 참 어려워요. 행정에서 지원하는 '농산업 청년혁신벨트' 같은 좋은 사업도 저는 나이 제한에 걸려 제외될 때가 잦거든요. 안타깝지만 어쩌겠어요. 더 열심히 뛰어서 이겨내야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청년도, 그렇다고 정책적으로 주목받는 세대도 아닌 나이. 애매한 경계에 선 그에게 지원 문턱은 유독 높았다. 하동군 '농산업 혁신벨트 조성'은 공동가공센터, 물류센터, 혁신지원센터 등 핵심 인프라를 마련해 청년 기업의 제품화와 유통·마케팅, 창업 보육 등을 다방면으로 지원하는 사업이다. 군은 농업과 농식품 산업 혁신을 선도하고자 하동차앤바이오진흥원을 연구개발(R&D)과 기업 지원 중심기관으로 확장하고, 옥종면에 농산물가공센터도 건립 중이다. 훌륭한 인프라이지만, 차 대표에게는 문턱 하나 건너편 이야기였다.

다시 피어나는 하동의 꿈
고향으로 돌아온 차 대표의 지난 10여 년은 헛된 방황이 아니었다. 쉬고, 다시 일어서고, 배우고, 도전하며 하동의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는 준비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단단하게 쌓여, 지난해 공장을 건축하고 올해 초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해썹·HACCP) 인증을 획득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의 발품과 손길과 고집이 빚어낸 결과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자연저장소는 단순히 농산물을 가공하는 공간을 넘어, 한 사람의 진심과 지역의 희망이 저장되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라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오늘도 원재료를 살피고 수출 서류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꽉 채우는 차 대표가 있다.
"올해 판매장을 만들고, 수출에 성공하면 그때 꼭 다시 인터뷰하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그땐 제대로 된 간판을 달고, 더 맛있는 하동의 맛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자랑할 게 아주 많을 거 같아요."
그의 손에는 방금 확인한 원재료 샘플이 들려 있었다. 손마디 사이에 배어든 농산물 향기가 왠지 모를 위로로 다가오는 것은, 그 손이 거쳐온 시간이 얼마나 정직했는지를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동의 자연을 오롯이 담아낸 그의 제품 한 팩, 한 병. 그 안에는 지리산 자락이 품은 땅의 기운과 10년을 기다려 피워낸 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 /이영호 기자